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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혁명가, 윤자영

2005/08/30 ㅣ 출처. <잊혀진 혁명가, 윤자영> 임경석 (<역사 속의 미래 사회주의>)

혁명가 윤자영은 삶은 그의 마지막이 알려져 있지 않아 사람들에게 신비감을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청년기에 3.1운동에 참여하고 이후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여는 혁명가와 마찬가지로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혁명적 결단으로 국내로 잠입하다

1919년 시위 주동혐의로 투옥되어 1년이 넘어서야 게 투옥되기도 했던 윤자영은 출옥후 사회혁명당을 거쳐 상해파 공산주의자로 22년부터 중국 천진등으로 망명하여 분열되어 있던 공산당을 통합하기 위해 분주히 활동하였다.
윤자영은 코민테른에 의해 공산당이 해체된 이후에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개시되던 1929년에 이미 핵심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해 3월 북간도 돈화현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가 결성될 때, 그는 중앙집행위원이자 조직부 책임자로 선임됐다. 단지 직위만 높았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활동 범위는 폭넓었다. 기관지 <볼셰비키>의 발간, 조직원의 국내 파견, 조직 체계의 개편 등 관여하지 않은 게 없을 정도였다.
윤자영이 공산당 재건운동의 일선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때의 시대 정황에 주목할 것을 권하고 싶다. 그래야 그 사람의 행동에 내재한 논리와 심리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는 운동 대열 안팎으로 폭풍이 휘몰아치던 격동의 시절이었다.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민중의 생활상이 급격히 악화되고, 사회적 심리 상태가 혁명적으로 고조되고 있었다. 소작쟁의와 농민폭동이 줄을 이었으며, 파업투쟁이 전 조선의 산업장에 급격히 확산됐다. 조선·중국 국경지대에서는 조선인 농민들의 반일 폭동이 연이어 계속됐다. 함경남북도 각군의 농민폭동, 북간도 5·30폭동, 길돈폭동, 추수폭동, 춘황폭동이 잇달아 터졌다.
또한 사회주의 운동이 급격히 좌선회하던 시절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당시 기승을 부리던 세계대공황을 최후의 파국으로 이해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대공황을 계기로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세계 혁명의 불길이 타오를 것으로 예견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급진적인 정책을 취했다. 그들은 혁명정세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으며, 대중을 무장봉기와 폭동 전술로 이끌었다.
코민테른이 망명지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에게 ‘1국 1당 원칙’을 요구한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코민테른은 북간도의 조선 혁명 조직을 해체하고 중국 혁명 조직에 가담하라고 지시했다. 조선 혁명운동에 참가하려면 북간도에 머물지 말고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계망이 퍼져 있는 국내로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북간도를 혁명운동의 전통적인 근거지로 간주해오던 조선인 망명자들에게는 가혹한 조처였다.
당시 조선 사회주의 운동 대열은 대략 3개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세력들은 별도의 정식 명칭을 갖고 있었지만, 통상 엠엘파, 화요파, 서울·상해 합동파로 불렸다. 이들은 북간도를 거점삼아 국내외에 걸쳐 활발히 활약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윤자영을 비롯한 서울·상해파의 대다수는 국내 잠입의 길을 택했다. 자체 조직을 해체하고 앞다투어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던 재북간도 엠엘파, 화요파 사람들과는 달랐다. 서울?상해파 사람들은 본부를 국내로 이전하기로 결의했으며, 1930년 4월부터 차례로 두만강을 넘었다.


지하활동가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다

그들이 안착한 곳은 식민지 공업화가 급격히 진행중이던, 질소비료공장을 비롯한 중화학공장 밀집지대인 함흥이었다. 새로 형성되던 대공장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의 근간으로 삼는 것이 그들의 목표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그해 가을 마침내 함흥 근교 내호리의 한 농가에서 비밀리에 제1회 간부회가 개최됐다. 윤자영은 참석자들을 대표해서 소리 죽여 연설했다. 경찰 문서에 서술된 표현을 보자. “조선 혁명은 조선인 만으로 구성된 공산당이 해야 한다…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한 우리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목적 달성에 매진하자.”
서울?상해파 사회주의자들의 반일 지하운동의 성과는 눈부신 바가 있었다. 그들은 중앙기관 산하에 4개 지방기관을 설립하는 데에 성공했다. 경의선, 경부선, 함경선 남부, 함경선 북부 위원회가 그것이다. 통상적인 행정 구역이 아니라 기간 철도망에 주안점을 둔 게 이채롭다. 재건될 당의 조직적 기초를 노동자 속에 두려는 그들의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전국의 도시와 철도 연선의 공장들 속에 비밀 세포기관을 설립해 나갔다. 일본 경찰이 적발한 바에 따르면, 세포 기관이 설립된 곳은 서울, 부산, 진주, 거제, 대구, 포항, 광주, 재령, 함흥, 원산, 청진이었다. 특히 서울 지역 조직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중등이상 각급 학교 학생층과 각종 공장·사업장의 노동자층 속에 당, 공청 세포와 좌익노동조합 조직망이 비밀리에 뻗어 나갔다. 또한 신간회, 노동총동맹, 농민총동맹, 청년총동맹 등의 합법 대중단체에 영향력을 발휘할 비밀 지도부도 결성됐다.


끝없는 시련과 좌절

하지만 서울?상해파 사회주의자들의 운동 역정은 매우 험난했다. 두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일본 고등경찰이 낌새를 채고 대 검거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문서가 바로 이 검거 사건의 수사 보고서였다. 전국에 검거 선풍이 불어 닥쳤으며, 수백명이 체포됐다. 2달 이상의 혹독한 취조 과정을 거쳐 66명이 검찰에 인도됐다. 전체 조직 규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일본 경찰의 추계에 따르면 노출된 조직원 가운데 64%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이 때 박해를 받았다.
이 그룹의 활동을 위축시킨 또 다른 요인은 운동 대열 내부에서 나왔다. 코민테른이 서울?상해파를 가리켜 종파 단체라고 낙인찍었던 것이다. 서울?상해파는 자신의 조직을 해체해야만 했다. 1930년 말엽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장고 끝에 결론을 내렸다.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해산하고 자신의 조직체를 ‘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준비회’로 개편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조치도 코민테른의 결정에 위반된 것으로 간주됐다. 서울?상해파 구성원들은 다시 한번 조직을 해체하고 코민테른이 승인한 조직선의 지도하에 개인 자격으로 활동해야만 했다. 일본 경찰이 검거 사건의 명칭을 ‘조선국내공작위원회 사건’이라고 붙인 것도 이 때문이었다. 검거 당시 서울?상해파 사람들은 중국공산당 동만특위 산하 조선국내공작위원회라는 기구 밑으로 재편중이었던 것이다.
서울?상해파 사회주의자들은 세계대공황기 조선의 반일 운동 전통에 뚜렷한 족적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그들의 실체가 일본 경찰에게 완전히 포착됐던 것은 아니다. 일본 경찰 보고서는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해 유감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들이 고백했듯이, “수뇌 윤자영 등 중요 관계자를 체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윤자영은 경찰의 삼엄한 수사망을 벗어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어디로 잠적했을까?


혁명의 수도에서 배신당하다

그는 검거사건을 피해 국외로 도피하는데 성공했다. 두만강을 건너 다시 북간도로 건너갔던 것이다. 그는 1931년 6월부터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동만주특별위원회 선전부에 소속됐다고 한다. 이때를 전후하여 그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로부터 1년 남짓 지난 뒤에 윤자영은 중국공산당 중앙간부 앞으로 특별한 청원서를 제출했다. 정일영(丁一英)이라는 당명(黨名)으로 작성된 이 문서에서, 그는 이론적·정치적 훈련을 위해 모스크바에 있는 국제레닌대학에 입학하기를 희망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이 협력해 줄것을 요청했다. 국제레닌대학은 각국 공산당 중앙간부들의 교육·훈련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이 청원은 다소 굴절된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국제레닌대학 입학 청원은 기각됐고, 그 대신에 모스크바에 소재하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이 허용됐던 것이다. 세계대공황이 아직도 격렬히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자본주의 열강의 산업 생산이 급각도로 곤두박질치는 대신에, 소련에서는 생산력이 급격히 발전하고 있을 때였다. 윤자영은 전성기 소비에트 러시아의 수도에서 다시 한번 학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37세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윤자영의 모스크바 유학 생활은 순탄치 않은 귀결을 맞은 것 같다. 1934년에 그의 운명에 먹구름이 닥쳤다. 그때는 스탈린 대숙청이 막 시작되던 초엽이었다. 그는 반당분자로 낙인찍힌 지노비에프의 동조자 혐의를 받게 된 것 같다. <지노비에프 논문 소지·유포 혐의로 조사받은 공산대학 한인 학생들의 신상명세서>라는 문서에는 여러 명의 한인 재학생 명단 속에 윤자영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의 최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조국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그가 어떤 회환과 심정을 가진지 아무도 모른다. 짙푸른 청춘에서 농익었던 40대까지의 기록은 그의 삶이 누구보다도 빛났음을 알려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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