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구독 및 후원 신청 |기관지 위원회 |
정세 |이슈 |국제 |비정규 |쟁점 |민주노동당 |생태 |문화 |전체기사
노동운동에 몸바친 '전위혁명가' 이주하

2005/09/29 ㅣ 황정규

이주하의 성장과정

이주하는 1905년 함남 북청에서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 살 나던 1909년, 가족이 원산으로 옮겨가면서, 아버지는 누룩 만드는 집에서 일을 했고, 어머니는 빨래와 바느질 등 품팔이를 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당시의 생활은 몹시 어려워 형제들은 제대로 된 공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는데, 원산으로 가족이 이주하게 된 것도 아버지가 항일활동에 참가했다는 혐의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중에 신식학교에 다니면서 머리를 깍았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나기도 한다.
아홉 살 되던 해에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아버지 몰래 중학과정의 원산의 광성학교에 입학해서, 3년 만에 졸업하고 보광학교에 진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보광학교 3년생이던 이주하는 담임교사가 만든 전단의 사본을 뿌리는 등 시위에 참가했고, 일본 경찰을 피해 당시 갑산 광산에서 일하고 있던 형 집으로 잠시 피해 있기도 했다.
그 뒤 원산으로 다시 돌아온 이주하는 22년까지 객줏집 심부름꾼, 일본인 가게 점원, 우편국 배달부 등을 전전했고 집안 형편이 좀 나아지자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그러나 휘문고보 생활도 얼마가지 못했는데, 3학년 때인 25년 동맹휴학을 주도했다고 퇴학을 당했다. 그가 공산주의 이론에 빠져든 것은 이 무렵의 일이라고 한다.
이주하는 25년,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한 사립대학에 학적을 두고 도서관에서 마르크스.레닌 저작들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일본의 공산주의 단체들과 접촉하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원산지역 노동자들을 조직하라!

28년 일본에서 돌아온 이주하는 원산지역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이 무렵은 이른바 ‘노동운동의 방향 전환기\\\'로 ’공장 속으로\\\'란 구호 아래 지식인들과 노동자와의 결합이 커다란 과제로 여겨지던 시기였고, 이주하도 이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원산에서 직접 부두노동자로 뛰어들어 활동하던 그는 29년의 원산대파업을 거치면서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기에 이른다. 그가 \\\'노동운동가‘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개량주의, 전위와 대중의 분리’로 비판받던 원산대파업의 뒷수습을 해내고 이를 재조직화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시기 그의 활동은 원산지역 노동운동가들을 모아 ‘태평양노동조합’(태로)을 결성하고 혁명이론으로 무장한 혁명적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과거 지식인 중심의 하향식 조직의 건설이 아니라 철저하게 노동자 중심의 상향적 조직 건설을 원칙으로 삼고, 현장 속으로 적극적으로 파고들어 평양고무공장 파업 등 서북 각지의 노동운동을 배후에서 조직해냈다.
이 과정에서 31년 경성의 활동가들과 연락을 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붙잡힌 그는 5년형을 선고받고 36년에 풀려났게 된다.(제1차 태로사건)
그가 중심적으로 활동하던 ‘태로’는 30년대 노동운동의 핵심이었다. 이들은 네 번의 검거 선풍에 의해 33년 소멸되었지만, 지역 조직은 살아 주요 공업지대인 북부지역의 각 공장에 세포조직을 두었고 자기활동을 계속해나간다.

36년 출옥한 이주하는 다시 원산을 중심으로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했다. 이때는 일제가 만주 침략을 눈앞에 둔 시점으로 국내의 운동 조직이 극심한 탄압을 받아 궤멸 상태에 이른 때였다. 그는 이강국. 최용달 등과 함께 철도. 화학. 금속. 목재 등 각 분야의 공장에서 지하조직 활동을 계속했다. 38년 철도국의 지하노조가 들통이 나 이강국 등이 체포되자, 이주하는 몸을 숨기고 이른바 \\\'국내 망명\\\'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해방될 때까지 그는 조직에 뿌리를 둔 소그룹 활동에 치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공산당에서 남조선로동당으로

그가 8.15를 맞은 곳은 진남포였다. 해방 뒤 잠시 병원에서 요양하던 이주하는 원산으로 돌아와 당 조직을 결성했고, 그 해 12월에는 박헌영의 요청을 받고 서울로 들어왔다.
사실 이주하는 과거 30년 조선 공산당에 입당해서 윈산 시당부 책임자로 지역에 근거한 노동운동 조직에 적극 관여하였다. 이후 박헌영계열이 주도적으로 구성한 경성 콤그룹에는 적극 참여하지 못하고 계속 현장 위주의 활동에 힘써왔었다.

그의 서울행은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다. 당시만 해도 남북을 통괄하고 있던 조선공산당의 중앙은 박헌영이 이끌고 있었으며, 당 정치국에 있던 이주하로서는 일제 때의 인연으로 보아도 당연히 중앙의 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국내파 공산주의자 거물인 이주하의 서울행은 북쪽에서 세력을 확장시켜나가고 있던 김일성 일파에는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그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준비위원 등을 지내지만, 김일성과 박헌영의 세력 다툼에 휩쓸려 그다지 두드러진 활동은 보이지 못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공개 활동에 익숙치 못했던 탓도 있는 듯싶다. 46년 9월 미군정과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조선공산당이 공세로 돌아서면서 그는 공산주의자 체포 1호가 되었으나 곧 풀려나 다음해 월북했다.
그러나 북한에서 김일성과의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자 49년 ‘노동당 남반부 무장 분야 책임자 겸 남반부 총책 김삼룡의 고문’ 자격으로 서울로 다시 내려왔다. 48년부터 완전히 비합법화되어 무장. 유격투쟁 쪽으로 치달은 남쪽의 공산주의 운동 상황은 그의 적성에도 잘 어울렸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 4.3사태와 여수 순천 반란 사건 이후 이승만 정부는 남로당 소탕작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1950년 3월 마침내 남로당의 핵심 지도자 김삼룡, 이주하, 정태식 등이 체포됨으로써 남한에서의 남로당의 지하활동은 사실 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남로당의 몰락위기는 1949년 9월부터 시작되었다. 9월 16일 당시 김삼룡의 심복 홍모라는 자는 경찰에 검거된 후 서울 시경 사찰과 경위로 특채되어 김삼룡의 비서 김형육 부부를 검거하였다. 여기서 입수된 첩보를 근거로, 3월 26일 자정 20여명의 형사대를 동원하여 예지동 아지트에서 이주하를 검거하였다. 김삼룡은 28일 북아현동에서 검거되었다. 검거과정에서 이주하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소지하고 있던 극약을 삼켰으나 죽지않고 20여일 만에야 회복되었다.
1950년 5월 17일 김삼룡, 이주하, 정태식에 대한 특별 재판이 열렸다. 이주하에 대한 재판은 정태식에 대한 재판 다음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검사의 논고가 있었고, 재판장은 최후 진술 기회를 주었다. 당시 이주하는 고향 원산에서 알게된 처녀와 늦게 결혼하여 체포당시 그에게는 세살박이 어린 자식이 있었다. 이주하는 담당판사에게 전향의사 대신에 “할 말이 많지만, 이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내 자식만큼은 나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최후진술을 마쳤다. 결국 이주하에게는 사형이 언도되었다.


뜨거운 삶을 살고 간 비운의 혁명가 이주하!

이주하는 몇 차례 검거된 뒤 보여준 \\\'단식투쟁\\\'을 통해 신화 같은 존재로 알려지기도 했다. 단식으로 맞선 그의 항거를 고문으로도 꺾지 못한 일본 경찰은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고 두 차례나 그를 \\\'증거 불충분\\\'으로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46년 가을 여운형, 박헌영, 김일성 등과 함께 당시의 \\\'지도자 군상\\\'의 하나로 이주하에 대한 글을 남긴 김오성(당시 인민당 간부)은 그를 \\\"철저한 신념의 사람, 냉철한 이지의 소유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주하의 첫인상을 \\\"이지에 찬 눈 그 굳은 의지를 나타내는 한일자로 다물어지는 입, 그 어떤 실정에도 끝나지 않을 만큼 냉철해 보이는 이마, 그리고 담력과 강인성을 보여주는 얼굴의 표정은 당돌한, 그러나 다시 뜯어보면 투쟁에서 빚어진 혁명전사의 인상\\\"이라고 쓴 김오성은 어느 회의에서 그에게 태도를 좀 누그러뜨리고 말했다가 \\\"동지들의 미적지근한 태도는 저들 반동 정객의 농락만 살 뿐\\\"이라는 대답을 듣는다.

이주하는 김삼룡과 함께 50년 5월 사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중 6.25 발발로 남한 정부가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하던 6월 28일 아침 총살됐다.

이주하는 일제하 노동운동가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고, 남로당의 주요 지도자로서 비합법 지하활동을 전개하다 죽은 혁명가이다. 그가 이끌었던 \\\'태평양노동조합\\\'은 30년대 가장 중요한 노동운동 조직이었고, 그 자신은 \\\'지식인\\\' 출신으로 일제말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이 전향하고 은둔할 때 끝까지 남아 노동운동에 몸바친 \\\'전위혁명가\\\'였다.
철저한 신념을 지닌 혁명가로서, 노동자들과 결합하기 위해 대중운동에 헌신한 운동가로서 이주하의 삶은 절대 잊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일제시대 이주하는 “대중과 혁명가의 결합을 이뤄낸 드문 사례\\\"로 발굴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발행. 노동해방실천연대(준) 홈페이지. www.hbyd.org 주소. (140-880)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3가 40-10 인영빌딩 3층 전화. 02) 2275-1910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