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구독 및 후원 신청 |기관지 위원회 |
정세 |이슈 |국제 |비정규 |쟁점 |민주노동당 |생태 |문화 |전체기사
[역사속의 사민주의 (7)]사회적 분업과 직접민주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직업적 정치가로서 사민주의자들의 비극

2009/04/20 ㅣ 김광수

시리즈 순서

1) 개관 - 역사의 범죄자 혹은 뻔뻔하고 파렴치한 사민주의자들의 역사
2) 학살의 역사 - 독일에서 벌어진 사민주의자들에 의한 노동자 도살
3) 이중대의 역사
4) 식민지 민중의 고혈을 짜는데 빨대를 들이댄 사민주의자들
5) 가부장제의 위선적인 수호자 사민주의자들
6) 사민주의와 케인즈주의
7) 사회적 분업과 직접민주주의
8) 산별노조


자기해방의 주체로서 노동자는 자본주의 분업을 거부할 권리가 있으며, 위계와 귀천이 있는 자본주의 생산의 분업을 분쇄하고, 평등한 관계에 기초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사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체제 내에서 이루어진 분업의 옹호자이자 수혜자다.

이러한 태도는 노동자를 해방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유권자 일반으로 보는 그들의 사고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분업에 익숙한 사민주의자들이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것이 직접민주주의이고, 생산자들의 통제였다는 사실은 역사를 통해 충분히 증명된다.

왜 사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분업체계에 그리도 붙박이처럼 연연했을까?

역사적으로 등장한 사민주의자들은 왜 그토록 박력이 없었을까? 권력이 자신의 품에 굴러들어오는 순간조차 망설이고, 과거의 적들에게 손을 내밀었던 정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원천적인 공포다. 반면에 투쟁하는 노동자에게는 사납게 굴었는데, 노동자들이 스스로 모든 것의 주인이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낼 때 그들은 노동자에게 사나워졌다.

의원은 계속 의원이기를, 사장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대리인으로서의 지위를 그들은 계속 유지하기를 희망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에 의해서 그 자리에 올려진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투쟁이 거간꾼이 아닌 주모자, 노동자 반란의 수괴를 요구하자 꼬리를 내리고 과거의 지위에 매달렸던 것이다.

그들의 모순된 행동은 그들이 관료주의에 오염된 정도가 아니라 관료주의 자체가 된 것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변에서 목도하는 노동조합관료들이 변모하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처음 노동운동을 시작할 때 치켜든 목줄기의 뻣뻣함만큼이나 단호했던 그들이 직업적인 상근자가 되고, 중앙직책을 계속 맡으면서 그 질서의 수호자가 된다. 노동조합운동이 사회전체에서 차지하는 공적인 역할을 확대하고, 이른바 책임있는 일원이 되고, 역할과 지위가 고정되고, 이러한 조직의 위계와 분업에 매우 익숙해지면서 관료가 되어간다.

자본주의 분업체제의 한 축 - 직업적 정치인

맑스주의 정당은 등장할 때부터 무정부주의자들이나 음모조직과 다르게 대중정당을 지향했고, 유럽 전체가 강화해가고 있던 입헌적 흐름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사민당이 의회민주주의의 확대 즉, 입법활동을 통한 노동자들의 정치·경제적 권리 확대를 목표로 했던 것은 자연스러웠고 진화의 방향이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 발전은 어제의 얼굴이 오늘의 얼굴이 되어야 하고, 미래의 얼굴도 되어야 하는 연속성이 요구되었다. 선거정치에 익숙해지고 스스로 그러한 선거정치를 창출했던 사민당은 직업적 정치인 집단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지구당이라는 개념을 만든 것도 사민당이었다.)

작업장에서 솟아나온 것 같았던 사민당의 의원들은 의원으로서 입법활동을 위한 전문가가 되었다. 망치를 손에 든 노동자도 기꺼이 의원이 되어 국정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표본이 되었을, 다른 말로 하면 정치적 아마추어리즘의 표상이었지만, 그들은 스스로 프로선수로 전향했다.

누구나 국가경영을 책임질 수 있고 선착장이든, 자동차 조립공장이든, 탄광에서든 위대한 정치가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던 그들이 스스로 그 가능성을 내친 것이다.

몇 년 전 민주노동당에서의 전국구 의원들의 순환임기제(4년임기를 2년씩 나누어서 하는 제도)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가 의원의 전문성에 대한 숭배에 기인했다는 것도 이러한 역설을 설명해 준다. 입법활동의 미신에 대한 숭배는 평범한 노동자가 정치하기는 어렵다는 역설적인 장벽을 만들어냈다.

초기 부르주아 의원들은 무보수였다. 나름 이러한 제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진보성 중의 하나였다. 즉 의원은 명예직이었지 밥벌이 수단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교양 있는 자산가(부르주아)는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식의 암묵적 합의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정당에서 의원이 배출되자 사정이 바뀌었다. 노동자에게 노동자의원이 된다는 것은 밥벌이 수단이 끊기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초기 노동자의원들은 의원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력히 제기했고, 얼마 안 있어 이런 제도, 우리에게는 세비로 알려진 제도는 바로 실시되었다.

당시 이것은 하나의 진보로 여겨졌지만 한편으로는 의원이란 직책이 자본주의 분업체계에서 한 자리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해고자들이 현장노동자들의 자발적 모금에 의해 생활을 하면서 실무자 역할을 담당했던 방식이, 전노협이 민주노총이 되면서 실무자에게 생활임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식으로 변모하고, 만년 실무자가 등장하는 것을 상기해도 이는 바로 이해된다.

노동자 정치는, 그리고 사회주의운동은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본주의사회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새로운 체제로서 독립되지 못하고 자본주의 분업체계로 서서히 흡수되었다. 그나마 이에 대해 가장 오래 저항한 것은 이런 저런 식으로 고립을 감수해야 했던 공산당이었지만, 그것도 나름 강력한 정당으로 성장했던 2차대전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자본주의 분업체계의 비극 - 노동자 계층분열

남한에서 노동운동이 나름의 위계를 구축하고 나자, 이는 가장 비극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특히 급속히 비정규직이 확대되었던 97년 IMF 이후 정규직은 나이에서나 경험에서나 작업장 내에서 형님들이 되고, 비정규직은 동생들이 되는 위계가 형성되었다.

그런 위계에 대한 어쭙잖은 고정관념은 현대자동차 류기혁 열사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다. 정규직 노동조합은 자본이 만들어놓은 이러한 위계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고,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자율성이나 동지적 연대를 이런 위계의 관점에서 부정했던 것이다.

통제의 대상으로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바라보았던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비정규직 노동조합에 대한 노골적인 비협조와 위압적 태도를 보였던 것이고, 남한 노동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만들어 놓았다.

노동자 민주주의, 공장위원회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동자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과 회의는 상상력의 부족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러한 상상력의 부족은 노동자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힘과 열정이 노동자들의 직접통제, 직접민주주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기인한다.

사민주의자들은 노동자의 직접통제와 직접민주주의가 발현된 순간마다 격렬한 적의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질서의 수호자이기를 자처했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가 죽은 곳에서 사회주의에 고유한 해방의 에너지는 나오지 않는다. 지배계급이 줄행랑을 친 곳을 노동자 대중이 차지하고 허구헌날 논쟁으로 시끌벅적하고 욕설이 난무하는 그곳이 새로운 민주주의가 탄생하는 곳이다.

불합리하고 즉흥적인 대중의 에너지가 있는 곳에서 전위는 그 생동감을 죽이지 않은 채 방향과 질서를 부여한다. 반면에 사민주의는 지배계급의 고상한 얼굴이 찌푸린 표정에 더 반응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대접받았던 구체제의 분업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동지에게 적의를 품고 적의 품에서 안락을 느끼는 것이다.

직접민주주의는 노동자의 본성이자 노동자 민주주의의 요체다

직접민주주의는 다중이 한자리에 다 모이거나 동시에 특정한 사이트에 모두가 접속해서 떠벌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직접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이 대의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 또한 아니다.

직접민주주의는 선출된 대표들이 그들을 선출한 주권자들의 정치적 의견에서, 혹은 정서에서 매번 모순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언제든 대표자를 소환 혹은 재선출할 기회를 갖거나, 선출한 자가 언제든 스스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법이 필요하고 법의 정의가 구현되기 위해서 국가폭력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입헌적 권리에 대한 숭배를 걷어치우는 것이다. 그들이 요구하면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 있는 권리를 민중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민주주의에 의해 완성되고 구현된다. 노동자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 노동자들의 민주적 자치능력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 자는 사회주의자가 될 수 없다.
발행. 노동해방실천연대(준) 홈페이지. www.hbyd.org 주소. (140-880)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3가 40-10 인영빌딩 3층 전화. 02) 2275-1910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