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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사민주의 (5)]가부장제의 위선적인 수호자 사민주의자들

2008/11/08 ㅣ 김광수

시리즈 순서

1) 개관 - 역사의 범죄자 혹은 뻔뻔하고 파렴치한 사민주의자들의 역사
2) 학살의 역사 - 독일에서 벌어진 사민주의자들에 의한 노동자 도살
3) 이중대의 역사
4) 식민지 민중의 고혈을 짜는데 빨대를 들이댄 사민주의자들
5) 가부장제의 위선적인 수호자 사민주의자들
6) 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
7) 사회적 분업과 직접 민주주의
8) 산별노조


성차별의 문제는 사회주의운동, 노동운동에서 여전히 내부의 적에 관한 문제다. 사회주의노동운동이 존재하는 시공간이 자본주의사회인만큼, 이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가부장적 질서가 여성의 비상에 족쇄를 채우고 있으며, 자본주의사회에 만연한 배금주의가 여성의 지위를 끊임없이 추락시키는 경향이 있고, 특히 사회안전망이 불비하고, 상대적·절대적 빈곤이 만연한 곳에서 이런 경향은 강화된다.

후진적인 국가일수록 노동자 밀집지역에서 가정폭력이 만연하고, 공단지역에 성매매 관련업소가 퍼져 있는 현실은 사회주의노동운동 앞에 성문제와 관련해 얼마나 거대한 과제가 놓여있는지를 서글프게 보여준다.

성평등과 노동운동

그러나 운동을 통해 자각을 한 노동자가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입증하는 무수히 많은 사례들은 사회주의운동이 여성해방의 주요한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87년에서 89년에 이르는 파업물결 속에서 남녀 간의 임금차별을 단번에 끝장냈던 수천 개의 사업장이 있었다. 이는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자명한 진리에 노동자 대중이 화답한 결과다.

마창지역에서는 수출자유지역의 여성사업장에 등장한 남성구사대를, 근처에 있던 타코마 조선소의 노동자들이 한 달 동안 수출자유지역에 출입하는 모든 남성들을 조직적으로 겁박을 해, 아예 씨를 말려버린 경험도 있다. 타코마 노동자들이 수출자유지역의 여성노동자에게 오빠나 아빠로서 동정심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을 같이하는 동지적 연대감으로 이런 무시무시한 위력시위를 벌인 것이다.

그런가하면 전노협 시절에 전노협 모범부부상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바람직한 성역할에 대한 기준을 제공했다. 한 예로 남편은 해고구속자, 그리고 해고구속자의 아내로 시작해 남편의 구속기간 중 자본과 권력에 대한 투쟁의 전면에 나섰던 아내의 변화와, 그런 아내의 변화에 감동하고 연대감으로 발전한 남편의 이야기가 있다.

이들은 자본주의 가부장제가 설정한 남편, 아내의 성역할을 뛰어 넘어 진정한 의미에서 반려의 관계를 창출했다. 부부간의 언어가 하대에서 존대로 바뀌고, 집안에서 가사노동이 분담되고, 자녀에 대한 훈육태도가 바뀌었다. 젊은 시절 이들 부부의 가정을 방문해 느꼈던 감동과 자각을 지금도 필자는 잊지 못한다.

가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사민주의자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노동운동이 여성해방의 조력자로서는 많은 한계를 노출시켰다는 것이다. 특히 성문제에서 보수주의에 묶여 있던 사민주의자들과 노동조합 관료들의 역할은 부정적인 면을 더 드러냈다.

19세기 말부터 가족수당을 요구하는 임금체계를 노동조합이 요구하면서, 노동운동은 이때부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남성노동자라는 전제를 항상 달고 다녔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여성의 사회참여나, 여성의 참정권운동에 그다지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노동자들의 참정권을 주장한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에서도 여성의 참정권은 단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회주의 정당이 등장하면서 노동운동은 비로소 형식상이나마 여성참정권의 강력한 옹호자가 되었다.

여성의 사회적 참여라는 면에서 보면 전쟁처럼 극적인 계기를 보여주는 때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민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반파시즘을 내걸고, 2차대전 기간 동안 같은 전선에서 나란히 투쟁했던 때가 두 당이 이룬 여성해방과 관련한 업적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전시에 여성들의 사회참여는 전시경제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혹은 레지스탕스의 투쟁때문에 겪어야 하는 희생의 중심에 있는 방식으로(레지스탕스의 어머니나 부인으로서, 그리고 사실은 가장 치열한 전선이었던 점령지의 레지스탕스의 후견인으로서), 더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의회였던 알제의회는 4월에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고, 이듬해는 여성투표권이 획득되었다.

소련에서는 최전선의 비행기조종사부터 탱크지휘관까지, 그리고 후방에서는 공장참호까지 여성이 없는 곳이 없었다. 나치들이 여성을 전투병으로 동원하는 것을 여전히 주저하고 있을 때, 스탈린주의자들은 뭐하나 봐주는 것 없이 여성을 동원했다. 그리고 소련 여성들은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전이 되자 동쪽의 스탈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사민주의 정당들은 여성들을 가정으로 몰아내기 위해서 열심이었다. 여성은 다시 모성과 가정성에 의해 사회참여라는 전시의 성과를 빼앗겼다.

이를 부추긴 것은 사민주의정당의 샴쌍둥이 격이었던 산별노조들의 뿌리깊은 성차별주의였다. 그런 면에서는 공산당도 별반 내세울 것이 없었다. 스탈린주의에 이미 종속되어 있던 공산당에서 혁명기 볼셰비키가 보여주었던 성역할에 대한 박력 있는 부정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했다.

복지사회와 여성들의 반란

전후에 사민주의정당이 크든 적든 기여한 복지사회 건설에서 여성은 가정을 지키는 존재로 위치지워졌다. 물론 복지사회는 여성의 권리신장을 촉진했다. 무상교육, 무상의료의 등장은 여성의 전통적 역할을 사회화함으로써 여성의 자유를 진작시켰고, 가전제품의 등장도 여성의 여가를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복지프로그램의 작성에서 여성의 사회참여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지만, 그 얼개는 가부장사회의 틀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여성은 소비자로서, 그리고 가정에서 보육과 자녀교육을 담당한 주부로서 역할이 주목되었고, 복지사회의 틀은 이러한 가정을 원활히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사민주의자들의 역사적 성과는 복지사회를 이룩한 것이었지만 가전제품에 둘러싸인 60년대의 여성은 참호 속에서 꾸겨져서 잠을 청했던 2차대전의 빨치산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사민주의정당에서 여성의 간부진출은 하늘의 별따기였고, 당원에서 여성의 비율도 극히 저조한 상태였다. 여성의 자아실현은 일부 특정한 여성들의 악전고투의 결과였다. 동유럽에 비해 서유럽의 사회참여가 한참 밑돌고 여성의원 비율이 턱없이 낮았던 이유는 사민당과 노동조합관료들이 갖고 있던 뿌리깊은 보수주의로 설명이 가능하다.

68년의 혁명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 기세를 보여주었다. 구좌파들에게 ‘미친좌파’들은 성적 방종을 떠드는 세력으로 묘사되었다. 점잖은 가부장 중심사회에 폭탄을 던진 꼴이었다.

그러나 68혁명 내부를 조금 들여다보면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68혁명세력 내부에서조차 여성은 보조적이었고, 남성들은 각광을 받는 지위를 구가했다. 68혁명이 성숙되어 가자, 결국 한 리플렛에서는 “사회주의 스타들의 부르주아 거시기에서 해방시키자”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글 옆에 있는 만화에는 한 여자가 도끼를 자랑스럽게 비스듬히 들고 있었다.

사실 사민주의자들이 직접민주주의, 직접행동, 헌신의 윤리를 비웃을수록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의 거세욕구는 높아만 갔다. 그리고 직접민주의, 직접행동, 헌신의 윤리가 빛을 발하던 시대의 여성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갔다.

3.8국제여성대회를 주창했던 클라라 제트킨이 다시 주목을 받았고, 서구사회에서는 잊혀졌던 3.8여성대회가 다시 부활했다. 크루프스카야, 이네사 아르망, 스탈, 콜론타이, 엘리자로바, 쿠델리, 나타샤, 니콜라예바 등 볼셰비키 여성들이 역사적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여성의 잠재력이 발휘될 수 있었던 볼셰비키

후진적인 러시아 사회의 이중적 굴레를 뚫고 혁명운동에 뛰어든 이들 여성들이 러시아 혁명에서 막대한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레닌형의 당 생활이 그녀들에게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민족이건, 성별이건 따지지 않고 오로지 혁명적 헌신성과 직업적 혁명가로서의 자질만을 평가했던 볼셰비키 조직은 여성에게는 세계사의 진입을 보장하는 관문이었다.

반면 노동조합에서 여성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는데 노동조합 결성 열풍이 있었던 1905년의 경우에도 남성노동자들의 비우호적 분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상적 통일성과 고도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던 당조직에서만 여성의 잠재력은 온전히 발휘될 수 있었다.

그것은 68년 당시 자본주의에 순응하여 관료화된 사민당이나 공산당의 조직문화와는 완전히 딴판의 것이었다. 사민당이나 공산당 등도 조직 내의 중요 직책은 사회적으로 일정한 지위로 상승한 소부르주아 내에서 충원되었다.

트로츠키가 오토바우어가 수장으로 있던 1910년대의 오스트리아 사민당에 대해 이죽거렸듯이, 그 당들은 교수들의 당이었다. 당연히 교수들의 대다수는 남성이었고, 여성활동가들의 입지는 그만큼 축소되었다. 나머지 중요한 역할은 상층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남성 노동조합관료들로 채워졌다.

따라서 68년 여성들의 도전은 그들에겐 일시적 충격에 불과했고, 당을 발전시킬 새로운 에너지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도화되고 있던 당들이 68혁명의 혁명적 열기를 흡수하여 활력을 얻는 방법은 참여민주주의를 확대하고 행동정당으로서 탈바꿈하는 것이었는데, 사민당은 물론이고 공산당조차 그러한 의지도 능력도 갖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여성해방운동은 당 밖에서 자신의 혁명적 열정을 조직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상당수의 여성운동이 탈정치화된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혁명운동에 있어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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