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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사민주의 (2)] 독일에서 벌어진 사민주의자들에 의한 노동자 도살

2008/09/05 ㅣ 김광수

시리즈 순서

1) 개관 - 역사의 범죄자 혹은 뻔뻔하고 파렴치한 사민주의자들의 역사
2) 학살의 역사 - 독일에서 벌어진 사민주의자들에 의한 노동자 도살
3) 이중대의 역사
4) 식민지 문제
5) 여성문제
6) 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
7) 사회적 분업과 직접 민주주의
8) 산별노조


사민주의자들, 혹은 사회주의를 말하지만 사민주의자들에 불과한 자들 앞에서 누군가 혁명과 봉기의 역사를 말하면 한여름 난로가에 앉아 있는 표정을 짓는다. 이 뼛속 깊은 곳까지 혁명이라는 말에 알레르기를 가진 자들의 머릿속에 혁명은 혼란과 무례함, 죽음과 파괴의 장일뿐이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부르주아들 눈앞에서는 고개도 못 쳐들 것 같은 이 위인들이 노동자와 혁명가를 학살하는 데는 단호하고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독일혁명의 좌절

에버트와 샤이데만은 1918년 당시에도 세계최대의 사회주의 정당이었던, 독일사민당의 지도자들이었다. 1918년에는 전세계 사회주의자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독일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했다. 혁명적 노동자, 병사들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평의회를 구성했으며, 평의회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대통령궁으로 들여앉혔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고, 그들의 권좌가 시작되자 혁명은 뒷걸음치고 종국에는 파멸의 길을 갔다.

1917년 혁명으로 세워진 러시아 소비에트 정권의 퇴보와 타락을 가지고 여러 가지 원인을 들고 있지만, 그 근본을 굳이 따지자면 후진국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지만 곧 이어 일어난 독일혁명이 좌절되면서, 후진공업국 러시아가 절실히 필요했던 발달된 서구사회의 지원을 받지 못한 점이다. 세계2위의 공업국이었던 독일의 지원이 없이도 러시아는 생존을 했지만 온전한 생존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독일에서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는가? 병사들과 노동자들은 분명 혁명을 원했고, 독일부르주아들과 왕당파 장교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으며, 러시아의 짜르에 못지않았던 카이저가 넋이 나갔는데 말이다.

독일에서 단 한 부류가 기정사실화된 혁명을 막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독일카이저가 무너진 공백을 민주적 개혁으로 채우기를 원했을 뿐이다.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로 가는 것은 먼 훗날의 과제였다. 이들은 혁명을 거론하는 것만으로 자신들이 혁명의 파고에 휩쓸려 갈 것임을 뚜렷이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사민당은 볼셰비키 혁명에 대한 극심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고, 독일이 볼셰비키 혁명의 길로 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혁명적 대중들에게 사회주의를 실현하겠다는 혁명적 공문구를 남발해 지지를 확보했다. 그리고 이들이 재빨리 손을 쓴 것은 혁명적 노동자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무장력을 노동자들 사이에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노동자들은 어제보다 오늘 훨씬 급진적이었고,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빠르게 의식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사실을 재빨리 간파했고, 결국 그들이 의존할 무장력은 혁명의 바깥, 즉 반동세력에게 있다는 점을 시인했다. 그들은 군대를 주목했다.

독일사민당과 자유군대의 야합

노동자들에 의해 어느날 갑자기 정부를 책임지게 된 사민당 지도부는 사민당 당원들이 제 1의 혁명적 구호로 여겼던 사회화, 즉 생산시설의 국유화를 대중들 면전에서 떠들어댔지만, 권좌에 올라 제일 먼저 한 일은 구 제정 군대의 장군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제정 군대의 장군들까지도 놀라게 한 이들의 융숭한 대접에 장군들은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했다.

당시 혁명독일의 주요정당은 독일사민당, 독립사민당, 공산당이었다. 공산당은 신생정당으로서 미미한 수준이었고, 독일사민당에서 탈당한 사람들이 만든 독립사민당은 혁명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민당과 독립사민당은 정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베를린평의회 집행위원회는 사민당의 수중에 있었다. 공산당은 혁명초기에는 구성조차 되지 않았고, 이후에도 여전히 정부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베를린에서 사민당 지도부가 혁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믿음직한 군사력으로 여겼던 것은 노동자 적위대 창설요구를 회피하고 군대 내에서 보수적인 사민당 당원들로 구성한 공화국 병사단이었다. 그리고 곧 믿을만한 수병 3,000명으로 구성된 인민해병대가 베를린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수병들은 곧 급진화되었고, 공화국 병사단이 사실상 에버르트, 샤이데만 정부의 군대가 되었다. 이들의 급료는 재벌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그러나 공화국 병사단도 독일이 자본주의로 복귀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사민당 지도부의 공문구를 진지하게 믿었고, 사회주의를 실현하겠다는 목표에 대해서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독일은 혁명적이었다.

그리고 베를린 평의회는 노동자 적위대를 대신해 베를린 경찰청을 접수해 방위군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독립사민당 좌파였던 이이히호른이 지휘했다. 결국 베를린에서 사민당 지도부 손아귀에 들어갈 군대는 사실상 없게 되었다.

고립무원에 빠진 사민주의자들은 구 제정 군대의 장교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자유군단이 구성되는 것을 용인하고, 이들이 혁명도시의 질서를 회복하는데 기꺼이 협력했다. 이 자유군단은 후에 독일혁명을 압살하는 도살자가 될 것이었고 히틀러의 길을 닦을 자들이었다.

자유군단에 모집된 자들은 1차대전의 종식이 일자리를 잃는 것을 의미했던 장교단과 돌격대였다. 이들은 믿을 수 없는 노동자들의 군대를 대신해 혁명좌파를 향한 사민당 지도부의 쇠망치 역할을 했다. 자유군단은 사민당 지도부의 하나였던 노스케의 지휘를 받았다. 후에 이들은 노스케의 군대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다.

학살, 학살, 학살

베를린이 사민당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판단되는 순간 노스케는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자유군단은 베를린으로 진격했다. 이들은 정부건물을 점거하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대포를 발사하고, 장갑차를 동원해 거리를 진압했다. 수천명의 포로가 학살되었고, 이 서슬에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학살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저항은 베를린에서 단 한차레의 진압으로 진정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간 베를린 노동자들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사민당정부는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독일혁명이 베를린에서 브레멘으로, 루르로 그리고 다시 베를린으로, 뭔헨에서 함부르크로 진행됨에 따라 자유군단은 그 어느 곳으로도 파견되어 노동자 전체에 대항해 학살을 자행했다. 수만명의 노동자들이 혁명정부를 방어하다가, 혹은 사회주의를 요구하다가 학살되었다.

혁명의 도살꾼들인 자유군단이 궁지에 몰린 것은 20년에 일어난 카프반란 때였다. 노스케는 반동장군들이 주축이 된 카프반란에서 자기휘하의 자유군단이 쿠데타 편으로 돌아서자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다. 자유군단은 사민당의 군대가 아니라 반동의 군대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카프반란이 진압되고, 카프반란을 진압하고 노동자권력을 세웠던 노동자들을 분쇄할 임무가 누군가에게 지워져야 할 때, 사민당이 주도하는 연립정부의 용인 하에 폰 제크트가 새로운 국방위원장으로 나섰다.

폰 제크트는 특별군사법원을 설립하고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는 전권을 연립정부로부터 부여받았다. 결국 반동의 구테타를 저지했던 노동자들은 카프반란을 방관했던 군대의 밥이 되었다.

학살은 어디에서나 벌어졌다. 루르지방에서는 재판도 없이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총살되었다. 질서회복의 외침하에 노동자들은 사민당 시장과 장관들의 환영 속에 진군한 군대에 의해 쫒기고 가두어지고 살해되었다. 그렇게 사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노동자로부터 지켜냈다. 그리고 지켜낸 권력은 히틀러에게 양도되기 위해 더욱 혐오스러운 성격을 강화하고 있었다.

독일혁명에서 사민주의자들은 미증유의 학살을 저질렀다. 독일혁명 전까지 사회주의자들의 분열은 1차대전에서 제국주의 전쟁에 찬성한 사회배외주의자,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고 외쳤던 볼셰비키, 제국주의 전쟁에는 반대하지만 내전을 도모할 배짱은 없었던 중앙파로 나뉜 것이었고, 서로를 절대 인정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증오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독일혁명기에 일어난 사민주의자들의 혁명적 노동자들에 학살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사민주의자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적대와 혐오는 사회파시즘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사민주의자들을, 혹은 그들의 영향력에 있는 노동자들을 파시즘과 동일시하는 몹시 비정치적인 분노는 통일전선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걸림돌이었다. 이는 결국 나치즘에 노동운동이 패배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노동운동의 깊은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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