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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야(金丹冶), 기억 저 편에서 드높고 허망한

1929년 여름, 국경을 넘는 단야

1929년 6월 말, 그다지 크지 않은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닌 서른살 남짓의 한 사나이가 모스크바를 떠나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을 가진 그 사나이의 앙다문 입에 심상치 않은 결의가 물려있고, 날카로운 눈에는 팽팽한 긴장이 묻어있다. 그는 치타를 거쳐 만주로 갈 참이다.
그는 7월 중순이 되어서야 만주리에 다다랐다. 만주리는 소련과 중국의 국경지대로 이곳에서 여권심사를 받아야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그때 그곳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대포 아가리에서 금방 불이 튕겨나올 듯, 살벌하고 묵직한 분위기에 잠겨있었다. 그 무거운 정적 속에서 마른풀을 가득 실은 수레가 바퀴를 삐걱이며 짐짓 게으르게 국경을 넘고 있다. 그 수레 풀 속 깊이 단야가 숨죽이고 숨어있었다. 빼어난 이론가이며 비합법활동가이자 국제주의자였던 단야는 서른 문턱에서 1929년 여름을 그렇게 맞이하고 있었다.
단야는 땀으로 뒤범벅이 된 몸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을 풀 더미 속에서 견뎌내고 있었다. 몇 번의 검문을 아슬아슬하게 지나 중국 동지의 안내를 받으며 마침내 중간 ‘연락기관??에 닿았다. 비로소 맥이 탁 풀리며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
그러나 무거운 생각이 저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망을 뚫고 ‘혁명운동의 참모부??인 조선 공산당을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지식인과 학생이 중심이었던 1920년대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주의운동의 씨를 뿌리려면 무엇을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코민테른 전권위원??으로 공산당 재건운동 임무를 띠고 조선에 파견되었던 그로서는 이 같은 생각을 잠시라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때마다 그는 코민테른이 1928년 12월에 발표한 ??12월테제??를 떠올렸다. ??지식인 조직이었던 조선 공산당의 파벌투쟁을 없애고 당에 노동자와 농민을 많이 끌어들이라??는 ??12월 테제??는 단야의 나침반이었으며 강령이었다. 그러나 이 ??12월테제??는 하나의 원칙이고 방침일 따름이었다. 구체적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사항들은 오직 단야 몫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별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단야는 온갖 생각을 밀쳐두고, 먼저 국경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조국에서 “서른, 잔치는 시작되었다??- 단야의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1928년 7월에 열린 6차대회에서 코민테른은 자본주의가 ‘일반적 위기 3기??에 빠지고 모순이 커져 드디어 무너질 위기에 처했으며, ??제국주의 중심부에서도 혁명적 위기가 성숙했다??는 ??과학적 전망??을 내놓지 않았던가.
“가난으로 내몰린 프롤레타리아트의 약속된 반란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조선 대중도 혁명적으로 진출할 것이다. 아니, 전투적인 파업투쟁이 이미 조선의 공장지대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다.?? 단야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실제로 1929년에 접어들면서 조선 노동자들의 파업이 크게 늘었고 투쟁도 더욱 굳세졌다. 더구나 그 해 1월 22일부터 시작해서 84일 동안 노동자 2,000여명이 함께 투쟁했던 ??원산 총파업??은 노동자의 힘과 단결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 원산 노동자들은 ??비겁한 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는 붉은 기를 지킨다??라며 우렁차게 ??적기가??를 부르며 기세를 올렸었다. 원산 시내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일제 군인과 경찰에 맞서 꿋꿋하게 싸우던 노동자 규찰대도 있었다.
단야는 당재건 투쟁에 앞서 생존투쟁을 벌어야만 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임무를 하나하나 실천하고 있었다. 양복을 사 입고 신식화가로 위장한 채 스미스가 살고 있는 서양인 교수 집에서 토론했다. 연희전문학교 뒷산이나 한강 건너 수풀 속에서 동지와 만났다. 단야는 모스크바공산대학 출신들이 모두 국내로 들어오기에 앞서 공산대학에 학생을 파견하는 일과 ‘혁명자 후원회?? 사업을 했다. 10월 중순까지 서울, 인천, 함흥, 흥원의 작은 조직들과 연락을 맺었고 모스크바에서 온 동지들 가운데 조두원만 빼고 모든 연결망을 구축했다.
그리고는 11월 13일, 1차회의를 열고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의 닻을 올렸다. ??공장과 작업장 광산에 뿌리내리고 그곳에서 가장 뛰어난 분자들로 구성된 진정한 공산주의자 단위를 건설한다. 그것을 기초로 공산주의자 협의회를 소집한다??는 것이 이들의 활동 목표였다. 이들은 노동자 중심의 지역별 단위를 만들고 그것을 전국적인 공산주의자 협의회로 묶어 당을 재건하려 한 것이다. 모스크바공산대학출신들을 중심으로 ??노동계급에 뿌리박은 볼셰비키 당??을 건설하려는 단야의 계획이 조금씩 실천되고 있었다.

다시 상해에서

단야는 조선에서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1930년 2월에 모스크바로 되돌아갔다. 그는 코민테른에 자기가 한 일을 보고하고, 9월에 다시 상해로 갔다. 그는 거기서 여관 지배인 노릇을 하면서 숨가쁘게 돌아가는 상해의 분위기를 익히고 정세를 살폈다. 중국공산당을 통해 앞으로 당재건운동을 같이할 동지 세명을 소개받았다. 그리고 코민테른의 재정지원을 받아 <콤뮤니스트>를 발간하면서 당재건운동에 뛰어들었다.
단야는 등사판 출판물이었던 <콤뮤니스트>를 달마다 만들어서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특수작업대??로 쓰려 했다. <콤뮤니스트>에 조선의 정치와 운동의 조직노선을 싣고 그것을 국내로 들여와 당재건의 무기로 삼으려 했다. 기관지 배포망과 ??독자반??을 만들며 ??노동자 통신란?? 등을 두어 현장과 정치 그리고 공장과 전국을 연결하여 당을 재건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1931년 3월, “공장, 광산, 철도, 부두 등 계급투쟁의 분화구 속으로! 그 속에서 선전하라. 조직하라, 투쟁의 불을 지르라!??는 ??창간선언??과 함께 <콤뮤니스트> 창간호를 냈다. 박헌영은 모스크바에 살면서 단야에게 글을 보냈으며 코민테른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렇게 둘은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역할을 나누어 함께 운동했다. 박헌영과 주세죽(박헌영의 아내)은 국제레닌대학과 모스크바공산대학을 마치자마자 1933년 1월 상해로 건너와 단야와 함께 살며 본격적인 ??지하활동??을 시작했다.
김단야와 박헌영은 ‘적의 끊임없는 체포와 추격??을 뚫고 <콤뮤니스트>를 7호까지 발간했다. 이들은 기관지를 출판하고 배포망을 구축하면서 ??대중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 볼셰비키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일에 모든 정신을 쏟았다. 그리고 혁명정당이 지도하여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혁명적 무장봉기를 성공으로 이끌어야 하며, 나라 안팎의 빨치산투쟁과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야와 박헌영은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콤뮤니스트>를 국내로 들여오고 그 기관지를 고리 삼아 당의 터를 닦는데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은 1932년 여름까지 인천, 부산, 평양, 마산, 진남포의 도시와 농촌에서 20명이 넘는 조직원이 있는 20개 남짓한 비합법조직을 유지했다. 그렇지만 일제 경찰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 조직은 더디게 확장되었으며, 김호반이 체포되면서 부산과 인천에 있던 <콤뮤니스트> 조직이 파괴되었다. 더욱이 조직에 큰 타격을 준 사건이 터졌다. 1933년 7월 박헌영이 또다시 체포된 것이다.
체포된 사람은 박헌영 하나만이 아니었다. 단야는 신문을 통해 김형선과 다른 동지들이 서울에서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단야는 국내 연결망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러나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야는 국내 연결망을 다시 만들고 모스크바에 학생들을 보내기 위해 정태희를 조선으로 보냈지만, 두달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10월 중순이 되어서야 신문을 통하여 그가 상해로 오는 기차역에서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단야는 일제 경찰의 끈덕진 추적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그는 마침내 모스크바에 절망적인 보고를 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나 혼자는 상해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단야는 모스크바로 돌아오라는 답변을 듣고 1933년 말 상해를 떠나 1934년 1월 24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급 범죄자’, 김단야

모스크바에 온 김단야와 주세죽은 1934년에 결혼했다. 세 번째 체포된 박헌영이 죽게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주변상황이 그들을 결혼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들은 상해에서 지하운동을 하던 때보다는 훨씬 안정된 생활을 했다. 김단야는 1936년까지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서 조선과장을 했으며, 주세죽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5개월 남짓 공부한 뒤에 외국인노동자 출판부 조선과에서 교정원을 했다. 비록 모스크바일지라도 이들은 조선 혁명사업에 어떻게든 관계 맺고 있었다.
1937년에 접어들면서 단야는 당재건운동에 뛰어들 기회를 다시 맞은 듯 했다. 코민테른이 단야를 조선에 파견하여 ‘당사업??에 나서게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일이 틀어지고 있었다. 소련 정보기관은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자료에 따르면 당사업을 위해 그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은 권고할 만한 일이 아니다?? 라고 통보했다. 그리고 1937년 11월 5일, 소련 내무인민부는 김단야를 느닷없이 체포해 버렸다. 그때부터 단야는 당재건운동가에서 ??일제의 밀정??으로 내몰렸다. 마침내 소련 최고 인민 재판소 군사법정은 단야에게 ??일제 첩보기관의 밀정이며 반혁명폭동과 반혁명테러활동을 목적으로 한 조직의 지도자로서 1급 범죄자??라는 판결을 내리고, 1938년 처형했다.
단야는 정말 ‘1급 범죄자??였던가. ??일제 밀정으로 판명된?? 김한과 함께 1929년에 당재건운동을 했으며, 박헌영이 상해에서 체포된 것을 의심하여 단야를 일제의 밀정이라고 몰아부친 듯 하지만, 그 근거가 매우 약하다. 또한 단야가 어떤 ??반혁명폭동과 반혁명테러 활동??을 했는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단야가 처형될 무렵, 스탈린 정권은 단야 말고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공산주의자를 트로츠키주의자나 간첩혐의로 숙청하고 처형했으며 고문으로 살해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수없이 많다.

그토록 쓰디쓴 운명, 주세죽

단야를 살해한 어두운 그림자는 주세죽을 비껴가지 않았다. 1938년 3월 15일, 김단야의 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으로 위험한 분자??가 되어버린 주세죽은 ??젖먹이 아이가 있는 점을 고려하여 모스크바시 경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조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주세죽에게는 백일이 갓 지난 사내아이 비딸리이가 있었다. 단야의 아이였다. 아홉 살 난 딸 박 비비아나는 이바노바시에 있는 국제유아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박헌영의 아이였다. 그 해 5월 22일, 스탈린 정권은 주세죽을 카자흐스탄으로 5년 동안 유배시켰다.
주세죽은 1938년 9월부터 꼬박 2년 동안 피혁공장에서 개찰원으로 일했고, 1940년 9월부터 1946년까지 까르마끄치구역 협동조합에서 근무했다. 1946년, 주세죽은 열여덟 살이 된 딸에게 <프라우다> 지(紙)에 실린 기사를 오려 보냈다. 신문기사 가운데는 ‘조선공산당 총비서 박헌영??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주세죽은 박헌영이라는 이름 밑에 밑줄을 긋고 그가 아버지임을 딸에게 처음 알렸다. 그리고 스탈린에게는 “조선에서 다시 혁명활동에 종사하게끔 저를 조선으로 파견해 주실 것을 간청”하는 청원서를 올렸다.
그러나 이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주세죽은 박헌영의 부인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아들 비딸리이는 이미 죽었고, “엄마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라난??딸을 만나지도 못했다. 주세죽은 1946년 7월부터는 봉제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다. 그리고 1950년대 중엽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첫 번째 남편인 박헌영마저 1952년 말 ‘미 제국주의 간첩??혐의로 숙청되었으며, 1956년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았을까. 주세죽은 소련에서 1989년 3월 복권되었다.
발행. 노동해방실천연대(준) 홈페이지. www.hbyd.org 주소. (140-880)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3가 40-10 인영빌딩 3층 전화. 02) 2275-1910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