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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세계 경제대공황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위하여

2008/11/22 ㅣ 김승호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 대표)

1. 들어가며 :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을 운동의 무기로!

이 위기는 알 만한 사람들의 눈에는 미국 주택시장 거품이 폭발한 지난해 여름(8월)부터 분명하게 다가왔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연구소에서도 이맘때부터 세계 경제대공황의 도래를 예상하며 사태의 추이를 추적해왔다. 이 시기를 전후로 해서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종주국인 미 제국주의도 이러한 정세변화에 맞추어 지배전략을 재검토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대통령 선거전에서 버락 오바마가 유력한 후보로 급부상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사물은 보편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연관지어 보는 것을 음모론이라고 단정하여 일언지하에 기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IMF 사태’ 당시에도 우리는 사태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도대체 왜 이 사태는 일어나며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아무도 시원한 답을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사태를 일어나게 하거나 그 사태에 관여하고 있는 행위자들의 움직임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거나 왜곡된 모습으로 전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점으로 말하면, 신문지상에는 사실 보도가 홍수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올바르게 체계적으로 연관지어 볼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홍수처럼 쏟아지는 사실들을 종합해서 읽어낼 이론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진보적인 식자층 가운데 상당수가 이 사태가 고통스럽지만 한국의 천민자본주의를 개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황당한’ 생각을 가졌다. IMF 통치(일각에서는 그 대신 ‘관리’라고 칭했다)체제에 반대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재협상조차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못했다. 주관적 희망을 객관적 현실에 그대로 투사한 탓이었다.

그 결과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 다만 누가 얼마나 그 고통을 나누어 가지느냐 하는 것만이 문제라는 식으로 담론 지형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식자층의 담론은 “노동자들도 고통을 나누어 져야 한다”며 정리해고제를 앞당겨 받아들이라고 압박했고, 민주노총 지도부는 그 압박에 굴복하여 전교조 및 공무원 노조 합법화를 반대급부로 받고서 정리해고제에 동의했다. 그래서 노동운동 안에서 “이것이 고통전담이지 고통분담이냐”, “고통전담을 강요하지 말고 고통을 분담하라”는 기이한 요구가 나오게 되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지금 비정규직이 890만 명에 이르게 된 것도 단결권과 관련하여 약간의 제도·정책적 개선을 확보하는 대신, 노동시장 유연화에 관해 양보하여 정리해고제를 받아들인 이 투항적 거래(deal)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현실에 대한 그릇된 인식 및 그 그릇된 인식에 기초한 그릇된 실천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부족한 것과 잘못된 것 사이에 큰 장벽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처럼 쓰라린 실패를 경험했으면 소를 잃었을지언정 외양간은 고쳤어야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노동운동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우(愚)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과연 경제에 대해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서 올바른 인식을 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했는가? 여전히 부르주아 경제학을 진리로 알고 노동자계급의 경제학인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을 외면하지 않았는가? 외면하기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을 왜곡되게 독해하거나 부르주아 경제학과 절충하려고 하지는 않았는가?
올바른 방법론에 입각한 올바른 이론에 의거하지 않고는 아무리 산더미 같은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박학다식할 수는 있어도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방법론이 유물론적이고 변증법적임을 분명히 했다. 그 방법론에 입각하여 연구한 결과물이 자본론을 대표로 하는 그의 노작들이다. 이 노작들에서 해명한 이론을 습득하지 않고 자본주의 현실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다. 스스로 연구하여 마르크스가 도달한 이론에 이른다면 모르지만 말이다.

2. 첫 번째 쟁점 : 위기의 양상 및 성격

부르주아 언론이나 담론들은 이 사태를 다들 ‘금융위기’라고 부른다. 저널리즘 상에서는 “금융 쓰나미”(문화일보), “금융 불안(중앙일보)”, “혼돈의 세계금융시장”(동아일보) “금융 대지진(조선일보)”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사태를 금융 영역에 국한시켜 바라보면서, 그 위기가 실물 영역에까지 ‘전이(轉移)’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인식틀에 따라 말하자면 위기는 이미 실물 영역에까지 ‘전이’되었다. 그래서 누구도 이제 더 이상 이 위기를 금융 영역에 국한시켜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은 이 위기가 질병이 옮겨지듯이 금융 부문에서 발생해서 실물 부문으로 전염되거나 전이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위기는 처음부터 금융과 실물이 맞물려서 진행되어 왔다. 한국의 IMF 사태가 금융이나 실물과 관계없이 (외환을 잘못 관리한 탓에) 외환위기로서 발생하고, 그것이 금융과 실물에 옮겨 붙은 것이 아니듯이! 사후에 다 밝혀졌다시피 “펀더멘털이 튼튼하다”는 것은 순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돈을 소낙비처럼 쏟아 부어 당장 은행이 파산하는 것을 막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부르주아 담론들은 이 위기를 “미국 발(發)”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얼핏 보면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이 부실화 되면서 월가에서 투자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하고, 이로 인해 상업은행에 신용경색이 오면서 주가가 폭락하는 등 금융위기가 온 다음, 이것이 전 세계로 번져나간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1929년에는 옳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자본주의에 적용하기에는 오류가 많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글자 그대로 글로벌(global)한 자본주의이다. 미국에서만 부동산 투기가 일어난 것이 아니고, 미국에서만 파생금융상품 거품이 부풀어 오른 것이 아니다. 지구촌 도처에서 동시에 그러한 양상이 전개되었다. 다만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미국에서 그 정도가 아주 심했던 것뿐이다. 중국의 부동산 거품도 적지 않게 심각하며, 은행파산이 먼저 일어난 곳은 오히려 유럽이다. 또 이른바 신흥시장의 금융부문이 미국 월가보다 먼저 붕괴하고 있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 전체가 이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 함께 맞물려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다중심으로서, 도처에서 발생해서 도처로 확산되고 있다.
대표적인 부르주아 이론지인 <이코노미스트> 지는 올 3월 일반적으로 쓰지 않던 ‘탈동조화’라는 용어를 만들어서 “탈동조화는 신화가 아니다”, “신흥시장이 세계경제를 살릴 것이다”라면서 이번 위기가 국지적인 데 그칠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같은 부르주아 이론가인 폴 크루그만 교수는 최근 “미국 은행의 위기와 헤지펀드와 신흥시장의 곤경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더 심한 고통의 악순환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현실이 이론의 오류를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번 위기는 1930년대의 대불황(the Great Depression) 이후 최대의 위기라고 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이론가 그 누구도 이번 위기가 그것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고 강도가 높은 위기이며, 또 그때보다 훨씬 더 심대한 사회·정치적 변화를 동반할 위기라는 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앞날의 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론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이론은 바로 그런 것, 앞을 내다보는 것을 위해 존재한다. 이 위기의 이후 전망과 관련한 보다 구체적인 지점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겠지만, 현재 전개되고 있는 위기는 그 양상을 두고 보더라도 1929년의 대공황과 그에 이은 1930년대 대불황을 능가한다.
조성되어 있는 투기 거품 및 시설과 생산의 과잉의 정도(이것이 경기순환에서 마루의 높이를 나타낸다)가 공황 및 불황의 골의 깊이를 좌우한다고 볼 때 무엇보다 이번 위기에 앞서 조성된 거품은 “전례가 없는” 규모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 규모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잘 모른다고 한다. 파생금융상품 총액이 약 6백조 달러에 달한다고 하는가 하면 신용-부도스와프만 하더라도 90조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6백조 달러라면 세계 총 GDP의 10배에 달한다. 80년 전에 비해 경제가 더욱 금융화 되었고 금융은 더욱 가공(架空)화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경제의 규모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고 세계시장으로의 통합성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그렇다면 경제위기도 그때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강하고 파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마땅하다.

부르주아 이론가들은 그때보다 국가의 조절능력이 엄청 높아졌고, 국제협력도 비할 바 없이 잘 되고 있기 때문에 붕괴가 아닌 연착륙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가의 조절능력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은 미 중앙은행의 전 총수인 그린스펀도 스스로 자인한 바이며, 국제협력이 기대할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은 며칠 전에 있었던 G20 정상회의가 증명하고 있다.

3. 두 번째 쟁점 : 위기의 원인

이번 경제위기는 무엇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가? 부르주아 이론은 이 지점에서도 천박하기 그지없다. 그들은 이 위기가 월가 투자은행 CEO들의 탐욕 때문이라고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위기의 원인을 미국과 월가에 국한시키는 것이 어불성설임은 차치하고라도, 이런 마녀사냥 식의 도덕적 비난은 원인 규명을 혼란시키는 부수적 효과를 노리고 있다. 고수익을 노리고 고위험의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은 책임이 이들에게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초유의 낮은 이자율로 이런 방만한 투자를 조장한 중앙은행과 이를 감독 또는 규제하지 않고 국책 보증기관을 통해 방조한 미 재무부는 책임이 없는가? 이른바 ‘소유자 사회’를 만들자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부가 도와줄 테니 자기 집을 가지라고 선동한 부시 대통령 자신은 책임이 없는가? 그렇다면 시장도 실패하고 정부도 실패하고 함께 실패해서 이런 사태를 만들어 낸 것이다.

시장과 정부는 어떻게 실패했는가? 물론, 그들은 신자유주의 정책 또는 패러다임을 집행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이렇게 말하면 진보적이고 과학적이라는 착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르주아 이론가들도 인정하고 있고 말하고 있는 바다. 케인즈주의자들은 다들 그렇게 말하고 있다. 미국에서 폴 크루그만 교수가 그렇게 역설하고 있고, 그 덕에 이번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한국 사람으로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인 장하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심지어 소련이 해체되고 나서 “역사는 끝났다”는 말을 해서 유명해진 부르주아 이데올로그인 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 같은 사람도 ‘미국 주식회사의 몰락’(the Fall of America Inc.)이라는 제하의 <뉴스위크> 지 기고를 통해 감세 및 규제완화와 같은 레이건 정부 이래의 ‘작은 정부’ 노선이 실패를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모두들 신자유주의 정책 패러다임을 개혁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다들 금융투기에 대해서는 관리감독을 강화하면서 과감한 재정정책을 펴서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고, 사회간접자본에 좀 더 투자하고 복지비용도 좀 더 지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처방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별도로 이야기하기로 하고, 원인의 진단에 있어서부터 이 부르주아 이론들은 변호론에 지나지 않는다. 다들 자본주의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신자유주의 정책이 문제라는 식으로 정언(定言)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왜 신자유주의 정책 패러다임(또는 축적 패러다임)으로 변화되었는가? 2차 대전 이후 케인즈주의 패러다임으로 30년 가까이 축적활동을 잘 해왔는데, 그래서 ‘30년 간의 황금기’라고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 패러다임으로는 축적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축적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한 것이 아닌가? 그러면 케인즈주의는 어째서 생겨났는가? 파시즘과 민주주의 간의 전쟁이면서 동시에 제국주의 상호간의 전쟁인 2차 대전을 겪고 나서, 노동자계급의 요구대로 사회주의 체제에게 자리를 물려주지 않기 위한 타협책으로 생겨난 것이 아닌가? 2차 대전은 왜 일어났는가? 1930년대 세계 대불황 속에서 자본이 살아남기 위해 상호간에 격렬하게 경쟁하며 식민지 획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라마다 군국주의화하고 제국주의화하여 쟁패전을 벌이게 됨으로써 일어난 것이 아닌가? 그러면 1930년대의 대불황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1차 대전을 겪고 나서 많은 자본주의 나라에서 자본의 가치가 대대적으로 파괴된 이후, 동시적으로 자본축적이 재개되는 과정에서 과잉투자 과잉생산과 금융투기 거품이 크게 일어났다가, 그 거품이 꺼지고 과잉생산이 유지될 수 없는 한계에 이름으로써 일어난 것이 아닌가?

자본주의 하에서는 왜 시시때때로 금융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투기거품이 일어나고, 또 실물에서도 과잉투자, 과잉시설, 과잉생산이 일어나는 것인가?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전유의 자본주의적(사적)인 성격 사이의 모순에서 비롯되어, 구조적으로 가치의 생산과 가치의 실현(즉 판매) 사이에 괴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하에서는 항상 상대적 과잉이 일어난다.
왜 상대적 과잉이 반드시 일어나는가? 자본이 이윤을 벌어서 다 소비한다면 축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확대재생산, 즉 경제규모의 성장은 일어나지 않으며 생산성의 발전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것도 이룩하지 못하는 자본주의는 착취체제로서 헤게모니(동의에 의한 지배)를 가질 수 없다. 자본주의는 축적하지 않고는 존립할 수 없다. 그래서 자본은 ‘자기 증식하는 가치’이다. 그러므로 자본의 인격화인 자본가는 탐욕의 화신이다. 일부 자본가만이 탐욕적인 것이 아니고 모든 자본가가 탐욕적이다.
그런데 자본이 벌어들인 이윤을 다 소비하지 않고 축적하는 순간, 생산한 가치를 실현할 구매능력은 그만큼 부족하게 된다. 그래서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과 소비(생산수단의 소비를 포함하여)의 괴리 즉 소비에 비한 투자와 생산의 상대적 과잉이 필연적이다. 이 과잉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자본이 나아가는 탈출구가 금융이고 투기이다. 금융은 잉여가치가 획득될 것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불확실한 곳에 화폐자본을 제공하여 투자와 생산이 이루어지게 한다면, 투기는 가치의 실체인 노동이 투하되고 잉여노동이 수취되지 않았는데도 잉여가치가 생산되고 실현된 것처럼 허구적으로 이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탈출구는 위험천만하다. 신기술이나 신제품이 개발되어 가치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새로운 기회가 대대적으로 열려서 그 허구를 실질로 대체해 주지 않는 한, 언젠가는 그 허구성이 드러나서 앙갚음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IT니 BT니 친환경상품이니 하는 것들 모두가 허구에서 실질로의 이런 대체를 이루기 위한 자본의 노력들이라 하겠다.

더구나 자본주의는 다수의 자본에 의해 무정부적으로 움직이는 체제이다. 앞에서 말한 과잉과 투기의 위험성을 알고 있더라도 그것을 완전하게 규제할 수 없다. 다수의 자본이 아니라 자본이 국가로 흡수통합되어 일체화된 국가자본주의(이것은 독점자본이 국가와 융합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와는 다른 개념이다. 현재의 중국이나 베트남을 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로 될 경우, 그 국가는 소유·통제권만 노동자계급의 수중에 넘어가면 사회주의로 되어 버린다. 따라서 무정부적인 사적 자본들은 경쟁적으로 위에서 말한 과잉생산과 투기거품을 만들어 내는 반면, 자본의 지배를 잃게 될까 두려워 총자본 차원에서 국가자본주의적 계획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계획을 도입한다고 해도 제한적인 데 그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뜻에서 사적 자본의 자유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행해지는 계획을 ‘유도적 계획’(indicative planning)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자본은 ‘증식 하는 가치’로서만 존재의의를 갖고 있으므로 자본주의하에서는 금융과 투기는 다소 규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생산 영역에서의 과잉을 원천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 요컨대 과잉생산을 낳고 투기거품을 낳는 원인은 자본 그 자체이며, 따라서 이번 세계 경제위기도 뿌리에까지 들어가 분석해 보면 자본 그 자체, 자본주의 그 자체가 원인인 것이다.

4. 세 번째 쟁점 : 위기의 전망

부르주아 이론가들은 오늘날의 자본주의에는 1930년대와는 달리 국제협력이 잘 되고 있기 때문에 대공황의 가능성이 없다고 즐겨 말한다. 이렇게 이들은 이번 위기의 앞날을 과학적으로 내다보기를 아예 포기하고 있다. 이 주관적인 희망을 내던져야만 자본주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내다볼 수 있다. 공황 국면이 도래하면 평상시의 모습이 순식간에 반대의 모습으로 돌변한다.
평상시에는 아주 인자하던 회장님이 불황이 오면 가차 없이 노동자를 대량 해고하는 데서 이는 잘 드러난다. 삼성 그룹의 경우 IMF 당시에 대량해고를 한 이후 ‘삼성맨’이라는 의식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고 하는데, 이것도 그룹 회장의 인간성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자본의 속성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밝혀준 바와 같이, 그룹 회장을 ‘인격화한 자본’으로 보아야만 그의 인격을 과학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IMF 사태 당시에 그렇게 무자비하게 정리해고 하지 않은 재벌이 있었는가? 현대는 달랐는가? 대우는 달랐는가?

자본이 축적의 위기를 넘어 존립의 위기를 맞는 것이 공황이다. 존립의 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계속 허우적거리는 것이 불황이다. 이런 공황과 불황의 국면에서는 자본의 행태는 호황 때와는 많이 다르다. 물론 호황 때나 불황 때나 ‘자기 증식하는 가치’로서 자본이 갖는 고유한 속성에는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자본이 갖고 있는 첫 번째 속성은 뭐니 뭐니 해도 노동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이다. 그런데 호황 때에는 적어도 노동력의 가치만큼은 지불하면서 잉여노동시간을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부불노동으로 탈취하고자 한다. 그래서 온정적인 모습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공황과 불황이 오면 자본에게는 더 많이 축적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기능하는 자본으로서 살아남느냐 아니냐가 문제로 된다. 따라서 자본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자본은 착취도를 높여서 이윤율을 높이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잉여 노동력은 가차 없이 축출된다.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임금을 삭감하고자 칼을 빼 든다. 1930년대 대 불황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도 자본은 이 같은 해고와 임금삭감으로 노동자에게 무수한 고통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에 노동자들이 강하게 저항했으므로 1920년대의 문화통치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합법적 노동조합 활동을 금지하는 파쇼통치로 이행했다.

위기 시대에 자본은 노동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자본은 각기 독립적이고 사적인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평상시에도 자본은 다른 자본을 수탈한다. 자본의 세계에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한다. 자본이 탄생하는 국면에서는 자본은 아직 다른 자본을 수탈하지 못하고 소생산자를 수탈하여 임금노동자로 전락시키는 데 머무른다. 그러나 일단 이 국면이 지나고 나면, 이제 힘 있는 자본이 힘 약한 자본을 수탈한다. 이런 수탈은 위기의 시기에 집중적으로 일어난다. 대자본이 중소자본을 수탈한다. 수많은 중소자본이 사라지고 그 몫을 대자본이 차지한다. 이처럼 이번 경제위기 속에서 IMF 사태 당시에 생생하게 경험했던 바가 더 큰 규모로 더 강도 높게 나타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독점자본 간에도 살아남기 위한 경쟁이 격화되면서 쓰러지는 독점자본의 자리를 다른 독점자본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삼성그룹은 IMF 당시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해고하고 중소 하청 자본을 가차 없이 수탈하여 거뜬히 살아남았으며, 이후 한국 자본주의에서 왕족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현대는 수위가 밀렸고 대우는 공중분해 되었다. 미국의 5대 투자은행들 사이에서도 골드만 삭스와 모건 스탠리는 금융지주회사로 변신하여 살아남은 반면 베어스턴스, 리먼브라더스, 메릴린치는 사라졌다.

부르주아 이론가들도 이런 사실까지 부인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마지막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자본은 위기의 시기가 오면 국가와 융합된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되어 안으로 노동자계급을 강하게 통제하면서, 밖으로 다른 나라의 자본을 수탈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손쉬운 것은 대항할 힘이 약한 나라를 대상으로 식민지화 하는 것이다. 값싸고 풍부하게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값싸고 풍부하게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상품을 독점적으로 판매할 수 있기 위해서, 식민지의 기존 자본을 수탈하기 위해서, 나아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이식/확장하여 더 많은 투자기회와 축적기회를 창출하기 위해서....
이런 경제침략은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에서는 평상시에도 간단없이 일어난다. 그러나 위기의 국면에는 훨씬 더 공격적으로 그리고 다발적으로 이루어진다. 경제적인 수단만이 아니라 군사적인 수단이 마구 휘둘러진다. 이러한 모습은 새천년에 접어들어 경제가 위기의 조짐을 보였을 때부터 위기에 대한 선제적 대응으로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어 왔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략이 전형적인 예이다. 이것이 이번에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등 미 제국주의의 신식민지로부터 이탈하려고 하는 세력에 대하여 군사적 침략을 포함한 공격이 가해질 것이다. 이 공격 대상에는 이 나라들을 지원하고 있는 쿠바도 포함될 것이다. 다른 한편 미 제국주의는 최근 국제형사재판소(ICC)를 추동하여 아프리카의 수단 대통령 오마르 알바시르를 기소하고자 했다. 이 또한 구 유고슬라비아 침략의 경우와 비슷한 목적과 방식으로, 이 나라를 군사적으로 침략하기 위한 예비행동이라고 할 것이다.
위기가 깊어지면서 이러한 사례들이 더욱 늘어나고 또 더욱 현실적으로 될 것이다. 이것은 제국주의의 본성에 아주 부합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이다. 어느 특정한 나라의 자본주의는 제국이거나 식민지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이 지점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식자층 가운데 수긍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도 제국주의 상호간의 대립과 전쟁에 이르면 태도가 달라진다. 제국주의 상호간에는 식민지 침략전쟁과 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전제한다. 경제적인 대립이 날카로워 지더라도 핵무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인류를 절멸시키는 군사적 대립, 즉 전쟁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판단은 과연 과학적일까?
핵무장 때문에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냉전 시기에도 핵으로 중무장을 했지만 미·소 두 블록은 한국전쟁과 월남전 등으로 대리전을 치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그런 대리전쟁의 하나였다. 위기가 깊어지면서 이러한 간접적인 형태의 제국주의 상호간의 전쟁이 빈발할 것이다. 최근에 벌어진 러시아와 그루지아와의 전쟁은 대리전의 형태를 띤 제국주의 상호간의 패권쟁탈전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이런 패권 쟁탈전이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제국주의 세력 상호간의 직접적인 전쟁으로, 전면적인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정세가 아직 그 정도로 발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미국 유럽 및 일본 등 기득권을 가진 제국주의 세력은 기존 질서에 변화를 가져오는 새로운 패권세력의 등장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태도였으며, 전 지구적 수준이 아닌 지역적(regional) 수준에서도 이를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입장은 미 제국주의의 경우에 매우 확고하며 위기가 다가올수록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잠재적인 패권세력 또는 지역적인 패권세력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중국과 러시아이다. 이 두 나라는 상하이 협력기구로 사실상 정치·군사적 동맹을 맺고 있다. 이들과 미 제국주의는 그 동안 외교적으로 ‘전략적 동반자’ 운운 했지만 물밑으로는 날카로운 경쟁과 대립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이번 경제위기가 현실화되면서 갑자기 러시아가 주된 표적으로 부상되고 있다. 러시아는 최근 언제쯤서부터 피델 카스트로가 적절하게 표현했듯이 ‘마키아벨리의 전략’에 의해 미 제국주의의 공격대상 일호로 지목되어 있는 것이다. 지난 7월과 8월에 걸쳐 미국이 러시아를 상대로 체코와 폴란드에 레이다 기지와 미사일 기지 등 MD 기지를 설치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또 일본은 지난 8월 군사용 위성 개발을 허용한 우주기본법을 시행했으며, 2015년까지 독자의 MD체제 구축에 나설 계획임을 발표했다. 이 또한 러시아와 중국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움직임을 볼 때 공황이 더욱 본격화되고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기존의 패권질서가 불안해지면,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미 제국주의가 앞장서고 유럽과 일본이 가세하여 잠재적 패권세력을 적으로 삼아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공황의 골이 깊을수록, 지배질서가 불안정해 질수록 그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미 제국주의를 비롯한 제국주의 나라들 안에서 계급투쟁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또 전 세계 노동자·민중이 이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그들이 반동적인 전쟁정책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아닐지가 결정될 것이다.

5. 나가며

자본주의 하에서 이윤율은 추세적으로 저하하는 경향을 띤다. 다만 자본이 착취도를 높이는 등의 반작용을 통해 이를 상쇄할 수는 있다. 그렇듯이 제국주의는 축적의 위기와 지배의 위기가 깊어지면 추세적으로 그 모순을 밖으로 전가하기 위해, 식민지 쟁탈전으로 그리고 패권쟁탈전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띤다. 다만 식민지 나라 민중들의 저항과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이에 대해 반작용하여 상쇄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위기의 시기에는, 특히 앨런 그린스펀이 묘사했듯이 이번 위기가 “아마도 한 세기에 한 번 있을 사건”에 해당하는 위기라면, 자본주의에서 장기적으로 이윤율이 저하하는 것이 필연적인 경향인 만큼이나, 제국주의 상호간의 전쟁 위험 또한 정세적으로 필연적인 경향이다.

그러나 더욱 주목해야 할 것,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죽어라고 동의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런 반역사적이고 반인륜적인 필연적 경향에 대응하여 사회와 역사를 인간이 해방되는 방향으로 힘차게 전진시킬 힘도, 이런 혼돈과 고통의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힘의 주체는 노동자계급일 것이고, 그들의 이념은 사회주의일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요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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