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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주의와의 투쟁을 희화화한 사노련

2009/04/20 ㅣ 황정규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하 사노련)은 작년 출범 즈음에 공개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문서에서 “혁명주의와 개량주의 사이에서 동요하는 중도주의 세력과 투쟁하면서 진정으로 혁명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는 노동자당을 조직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한편 중도주의 개념에 대한 사노련의 생각은, 올해 3월 사노련이 총회를 통해 결정한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투쟁 전면화를 위한 정치방침」의 해설에 상술되어 있다. 사노련이 중도주의란 말을 자주 거론하고, 「정치방침」의 해설을 통해 중도주의를 길게 설명한 것은 그만큼 사노련이 중도주의란 개념을 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러나 사노련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중도주의란 개념은 실제 사노련의 실천에서는 별로 중요한 규정력을 갖지 않는다. 사노련의 중도주의 개념은 형식과 수사만 있는 속빈 강정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과거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중도주의와 어떻게 투쟁했는지를 확인해서 사노련과 대비하면 곧바로 드러난다.

과거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중도주의에 대한 투쟁

- 중도주의를 구체적이고 분명한 기준을 갖고 규정했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중도주의와 투쟁한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개한 중도주의와의 투쟁이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운동 내에는 사회국수주의, 중도주의, 국제적인 혁명적 사회주의라는 세 가지 경향이 존재하였다. 이들 세 경향을 구분지은 것은 단순히 혁명과 개량에 대한 태도뿐만 아니라 당시 발발한 제국주의전쟁에 대한 태도라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것이었다.

사회국수주의자들은 말로는 사회주의를 떠들었지만 행동은 국수주의적인 자들이었으며, 제국주의 전쟁을 “조국방어” 전쟁이라고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노동자계급을 살육의 현장으로 떠밀고 자본의 하수인이 된 노골적인 배신자들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볼셰비키와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등 찜머발트 좌파는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고, 이 전쟁을 혁명적 투쟁과 내전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던 국제적인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중도주의자들은 이들 사이에서 동요하며 입으로는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떠들었지만 행동으로는 사회국수주의자들과의 통일을 주장함으로써, 사회국수주의자들의 본질이 대중적으로 밝혀지는 것을 방해하고, 이들의 영향력이 유지되는 것을 도왔으며, 이들을 완전한 정치적 파산몰락으로부터 구원하였다.

제국주의 전쟁과 사회국수주의에 기만적이고 화해적인 태도를 보인 중도주의는 오히려 노골적인 사회국수주의자들보다 더 심각한 운동의 해악이었다. 그래서 레닌은 중도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격하게 비판을 하였다.

“‘단결’과 ‘조국방어’라는 그들의 선전을 통해, 타협을 가져오려는 그들의 노력을 통해 깊게 자리 잡은 차이들을 말뿐인 장막으로 가리려는 그들의 수고들에 의해, ‘중앙주의자들’은 노동운동에 가장 거대한 위해를 야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국수주의자들의 도덕적 권위의 최종적 붕괴를 방해하고 있으며, 이러한 방식으로 대중들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지원하고 있으며, 기회주의적 제2인터내셔날이라는 시체에 생기를 주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리스 수바린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우리는 ‘디 인터나치오날레’ 잡지의 중요 사설의 저자가, 카우츠키주의 ‘중앙파’가 공인된 사회국수주의보다 맑스주의에 더 해가 되고 있다고 단언하였을 때, 그가 매우 옳았다는 것을 확신한다.” (「사회주의와 전쟁」)

이처럼 당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중도주의와 투쟁하였을 때, 이들은 중도주의를 추상적이고 애매한 기준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한 기준으로 규정하였으며, 노동자계급대중에게 자신과 중도주의자들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때문에 당시에 중도주의자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차이는 누가 보아도 분명하게 드러났고, 누가 혁명적 사회주의자이고 누가 중도주의자인지는 논란의 여지없이 쉽게 구별되었다.

- 중도주의 세력과 철저한 단절을 이루고자 한 혁명적 사회주의자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분명한 기준을 갖고 중도주의를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규정한 중도주의자들에 대한 태도 역시 분명하고 단호하였다.

레닌은 중도주의세력에 대한 태도에 대해 “기회주의자들 및 국수주의자들과 분화하는 것이 혁명세력의 최우선의 의무”이며, 진정한 혁명세력이 남들과 구분되는 특징 또한 “사회국수주의와 ‘중도주의’ 양자와의 완전한 단절”이라고 말했다.

혁명적인 새로운 인터내셔날의 건설에서 중도주의자들과 같이 한다는 것은 물론이고, 이들과 같이 인터내셔날의 건설문제를 토론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중도주의는 운동의 해악이라고 보았고 철저한 단절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중도주의와의 투쟁은 1920년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급진화하는 대중의 분위기에 눌려 중도주의 정당들은 코민테른 가입을 협상하기 위해 2차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코민테른 참가자들은 중도주의자와 함께 토론하지 않았다. 이들은 중도주의에 대한 보다 강경한 단절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1920년 코민테른 2차 대회는, 중앙파와 완전한 단절을 하며 이를 거부하는 당원의 출당을 요구하는 21개조의 ‘가입조건’을 채택하였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중도주의와의 투쟁을 희화화한 사노련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중도주의를 규정하고 이와 단호히 투쟁했던 과거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사노련은 자의적으로 중도주의를 규정하고 스스로 이렇게 규정한 이른바 ‘중도주의세력’과 사회주의정당 건설 전면화를 위한 토론회를 ‘대담하게’ 진행하고 있다.

- 자의적 기준밖에 없는 사노련의 제멋대로 식 중도주의 규정

사노련에 의하면 한국의 중도주의는 “19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으며, “혁명적 사회주의 전통에 확고하게 기초하는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정립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모호함으로 가득 찬 정치노선을 특징으로 갖게 되었다”고 한다.

정치세력을 제대로 규정하려면 추상적인 문구가 아닌 구체적인 기준을 가지고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개된 중도주의에 대한 투쟁은 이를 보여준 전형적인 사례였다.

그러나 사노련은 한국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존재해왔다는 중도주의에 대해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정립”하지 않았다는 것과 “모호한 정치노선”이라는 추상적이고 자의적인 기준을 들이대는 것밖에는 못하고 있다.

게다가 사노련은 “정치적 모호함”이라는 자의적이고 말 그대로 ‘모호한’ 규정을 중도주의의 핵심으로 보고 있으며, 이 “정치적 모호함”에서 현실 운동의 오류를 끌어내고 있다. “현장투사들이 조합주의로 퇴행하고 나아가 노동조합 좌파관료”로 타락한 것도, 바로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확립하지 못하여 정치적으로 모호하기 때문에 동요도 하고 방향을 못 잡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로 이러한 분석이 정말 유물론을 말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분석인지 심각한 의문이 들 정도이다. 맑스는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해왔고, 이는 사회주의자가 현실을 보는 불변의 지침이다. 즉 각 정치세력, 조류가 등장하게 된 것은 누구의 머리에서 사상을 정립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현실적인 계급관계,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노련의 방법론은 존재에서 의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서 존재가 나오는 것이다. 혁명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한 모호한 생각이 문제라는 것이니, 그 기준이 자의적이고 제멋대로일 수밖에 없음은 필연적이라 하겠다.

- 쉽게 용서도 할 수 있고, 함께 당건설 토론도 할 수 있는, 사노련의 중도주의에 대한 태도

“혁명사상”의 정립, “정치적 모호함”이라는 자의적이고 추상적인 기준 외에 어떤 구체적 내용도 없다보니 중도주의세력에 대한 태도 역시 제멋대로일 수밖에 없다. 즉 모호한 생각이 문제이니 모호한 생각을 버리면 되는 문제이고, 이 생각을 버렸는지 안 버렸는지는 사노련의 자의적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제 사노련은 미륵불이 되어 관심술로 모든 이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지경에 도달하였다. 이러한 추론은 사노련의 문건들을 통해 확인된다.

사노련에 따르면 “중도주의 조직들이 이후 정치적 모호함의 문제를 해결하고 지난 과오를 털어버리고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으로 거듭난다면 언제든지 당 건설을 향해 함께 전진할 수 있는 길을 진지하게 모색할 것”이다(「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을 위한 연대와 결집 방안」). 이 말은 모호한 정치노선을 버리고 혁명사상을 정립하면 중도주의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노련의 「정치방침」 해설, 보론의 경우에는 “중도주의 세력이 현실적 이해관계 때문에 ‘말로만’ 사회주의 혁명정당의 정치노선을 동의한다고 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 이에 대해 “과거 중도주의 노선이 낳은 두드러진 실천적 과오를 솔직하게 반성하고 있는가를 보면, 사회주의 혁명정당의 정치노선을 ‘말로만’ 동의하는지 진심으로 동의하는지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강조는 필자)라고 답하고 있다.

결국 기준 자체가 자의적이고 관념적이다 보니, 솔직해 보이는 반성문 정도면 중도주의 문제는 해결될 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중도주의 규정이면 민투위도 “정치적 모호함” 때문에 변질되었고, 이 “정치적 모호함”만 극복하면 함께 할 수 있는 세력이라고 보는 것인지 묻고 싶다. 사노련 입장의 논리적 결론은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 이른바 ‘중도주의자들’과 당건설 토론을 함께 하는 황당무계한 행동으로 사노련의 중도주의 개념의 본질은 폭로되었다.

올 1월, 사노련은 ‘사회주의당건설 전면화를 위한 전국공동토론회’를 본인들이 중도주의라고 비판하던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준비모임’(이하 사노준)과 함께 하기로 결정하면서, 자신의 “중도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사노련은 자신들이 설정한 중도주의와 단호히 투쟁하기는커녕, 이른바 ‘중도주의자들’과 당건설을 토론하기로 결정하였다. 중도주의와의 ‘단절’이 아니라 중도주의와의 ‘당건설 토론’! 이것이 사노련의 행동방침이다.

과거의 혁명가들이 무덤에서 나와 자칭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중도주의와의 얼치기 투쟁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질 만한 일이다. 그리고 꾸짖을 만한 일이다. “우리들이 중도주의와 이렇게 투쟁하라고 가르쳤냐”고 말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사노련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정당화하려는 속물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토론만 함께하는 것이지 당건설을 실제로 함께 하겠다는 것은 아니라는 둥, 대중들이 중도주의의 폐해를 잘 모르니 대중적으로 폭로하고 검증하려는 것이라는 희한한 궤변을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이른바 ‘중도주의자들’과 함께 ‘정세와 당건설’에서부터 시작하여 ‘강령’과 ‘변혁전략’을 논하는 수준으로 토론을 진행하고 있으며, 서울, 울산을 찍고 전북, 충북 등 전국으로 확대하여 진행하고 있다. 중도주의 비판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몸은 스스로가 중도주의라고 비판한 세력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중도주의세력과는 당건설을 함께 하는 것은 물론이고 당건설토론을 한다는 것조차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 중도주의세력으로 규정한 세력과 건설될 당의 강령을 토론하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는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얼치기 사이비 사회주의자일 뿐이다.

사노련은 자신이 전가의 보도처럼 말하던 “중도주의”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아무런 실천적 내용도 없는 허구이고, 자신이 혁명적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심리의 발로 외에는 아무것도 아님을 자신의 실천을 통해 증명한 것이다.

중도주의 개념을 통해 알 수 있는 사노련의 기회주의적이고 속물적인 태도

그런데 이 과정을 자세히 고찰해보면 사노련의 중도주의 개념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노련의 자의적이고 기회주의적 실천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실제는 그 역임을 알 수 있다.

사노련은 자신의 ‘혁명성’을 남에 비해 부각하려고 중도주의란 개념을 꺼내들었다. 구체적 상황에 대한 고민없이, 실천적 진지함이 없이 나온 이 개념은, 사노준과 함께 하며 당건설을 논의하고 싶은 현실에 부딪치자 순식간에 헌신짝처럼 버림을 받게 되었다.

현실적 이해관계가 말보다 앞선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이 명제의 진리는 이렇게 입증되었다. 그러나 사노련은 이런 사실을 못 본채 하면서 여러 가지 궤변으로 자신의 실천을 정당화하는 속물적이고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사노련식의 “중도주의” 개념과 스스로 중도주의세력으로 규정한 세력에게 보이는 한없이 유화적인 태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원칙 없고 기회주의적이며 속물적인 사노련의 모습이다. 사노련의 중도주의 개념이 현실에서 한 줌의 유의미성이라도 있다면, 바로 이러한 점에 있을 것이다.

사노련은 제국주의전쟁에 대한 반대투쟁과 제3인터내셔날의 건설투쟁 과정에서 치열하고 단호하게 전개된 선배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중도주의와의 투쟁을 희화화하였으며, 이를 통해 스스로를 한없는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 [42호] 사회주의 당건설에서 원칙없이 오락가락하는 사노련
→ [43호] ‘여전히’ 원칙을 저버리고 오락가락하는 사노련
→ [44호] 관료주의적으로 변질되고 타락한 세력의 구원투수로 나선 사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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