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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노비는 영원한 노비?
- 거덜 난 신자유주의 시대 청년세대의 자화상 -

2008/11/08 ㅣ 박남일 (저술노동자)

88만원 세대. 이 말은 “20대여, 토플 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라는 다소 자극적인 메시지가 붙은 책 제목이다. 더불어 신자유주의 시대 청년세대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상위 5% 정도만이 대기업이나 공무원과 같은 보장된 직장을 겨우 얻을 수 있고, 나머지는 이미 800만 명이 넘어선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마지못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세대에 붙은 딱지인 것이다.

산술적으로만 계산하면, 이들은 지금 화폐가치 기준으로 평생 88만 원에서 120만 원 사이의 임금을 받게 될 것이다. 한 번 비정규직은 영원한 비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승자독식 사회에서 탈출구가 없는 그들의 처지는 마치 조선 시대 노비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물론 중세시대 노비의 삶과 21세기의 젊은이들 삶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경제적 지위만 놓고 보면 그 답답한 처지가 크게 다르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노비의 삶은 어떠하였을까?

노비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온몸으로 떠받친 사람들

‘쇄미록’이라는 책이 있다. 임진왜란 전후 약 9년간의 상황이 생생하게 기록된 일기문이다. 저자 오희문(1539∼1613)은, 인조 때 영의정 오윤겸의 아버지이자 병자호란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오달제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오희문은 학식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왕의 교서, 의병들의 글, 유명한 장수들이 쓴 성명서 등 전란 중에 보고 들은 귀중한 역사 자료를 쇄미록에 남겼다. 그 책에는 당시 노비의 삶을 잘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오희문 집에 열금이라는 늙은 비(婢)가 있는데, 병이 무거워 일을 놓고 외딴 흙집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런 열금이 음식만큼은 평소처럼 먹어댔다. 그러자 저 꼿꼿한 선비 오희문은 열금이 일찍 죽지 않을 것을 걱정하며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곡식이나 덜 축내고 죽었으면’ 하는 속내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사흘 뒤에 열금이 죽었다. 이에 대하여 오희문은 이렇게 말한다.

“비록 죽었으나 그리 애석하지는 않다. 다만 어릴 때 데려와 부렸는데, 나이 70이 넘도록 도망치지 않고 근면검소하게 집안일을 잘한 것은 취할 만하다.”

열금은 죽은 다음날에 땅에 묻혔다. 오희문은 노비 몇을 시켜, 열금의 시신을 5리쯤 떨어진 양지에 묻게 하였다. 하지만 열금과 평생을 함께한 그 주인은 겨울이라 날이 춥다는 이유를 대며 장지에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 시대 늙은 노비의 처량한 최후를 보여 주는 장면이다.

우리가 아는 인류의 역사는 대개 통치자들의 역사다. 흔히 말하는 ‘역사의 수레바퀴’라는 관용적 표현에 따른다면 역대 통치자들은 그 수레 위에 걸터앉아 고삐를 쥔 사람들이다. 그래서 덕 있는 통치자는 반반한 길로 수레가 잘 굴러가게 하지만, 어떤 통치자는 수레를 잘 못 끌어 진흙탕에 처박기도 하였다. 수많은 역사가들이 주로 연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역대 통치자들의 ‘고삐 쥐는 법’일 것이다.

그런데 ‘역사’라는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를 온몸으로 떠받치며 구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름 없는 다수의 피통치자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짜 ‘역사의 수레바퀴’였다. 그중에서도 수레의 하중을 가장 많이 받은 계층은 바로 노비(奴婢)였다. 평생을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사람들. 그들은 과연 어떻게 노비가 되었을까?

일천즉천( 一賤卽賤) 원리에 따르되, 국가에서 노비 수 조절 시도

한반도에서 노비의 존재는 기자(箕子)조선의 ‘팔조법금(八條法禁)’에 처음 나타난다. 당시에는 주로 범죄자를 노비로 삼았다. 전쟁이 잦았던 삼국시대에는 넘쳐나는 포로들이 노비가 되었다.

그러다가 전쟁이 수그러든 고려에 이르자 노비 공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에 고려 정종 5년(1039년)에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이 제정되었다. 아비가 귀족이어도 어미가 노비면 그 자녀 모두 노비가 되는 법이다. 이 법을 이용하여 고려 호족들은 교묘하게 노비 수를 늘려갔다.

개인이 소유한 노비 수가 늘고 양민이 줄어들자 고려 조정은 시름에 잠겼다. 노비들 처지가 안쓰러웠기 때문이 아니라, 양민이 줄어들어 조세 수입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앙 통치자들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 따위 기관을 설치하여 많은 노비를 풀어 주었다.

또 조선 초기에는 한때 아비의 신분을 따르는 종부법(從父法)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힘 있는 양반이 많은 여자를 거느리는 일부다처제 사회다 보니 종부법은 양반 수를 급격히 늘려 놓았다. 이래저래 모두 문제였다.

그래서 영조 대에는 어머니가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이 되는 ‘종모종량법(從母從良)’이라는 것을 만들어 시행케 하였다. 그러나 노비 소유주들의 사욕 때문에, 일천즉천( 一賤卽賤) 관행이 계속 되어 사노비 수는 여전히 늘어만 갔다. 부모 한쪽이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노비의 혼인을 법으로 금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비가 특정한 상대와 혼인을 하여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신혼살림을 차릴만한 재력도 없으려니와, 주인이 쉽게 허락해 주지도 않았다. 또 노비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들 대부분은 아버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혼인하지 않은 여종이 출산을 하더라도 주인들은 묵인하였다.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마다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 노비라고 모두 똑같은 노비가 아니었다. 국가에서 소유한 관노비의 처지는 조금 나아서, 드물기는 하지만 그 자신이 노비를 부려먹고 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대다수 사노비들은 주인집 행랑채 한 귀퉁이에 거처하거나, 동네 귀퉁이에 허름한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대부분 단출한 모자(母子)가정이거나, 서로 핏줄이 다른 재결합가족이었을 터다. 가족 각자가 다른 주인을 섬겨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노비는 상속이나 매매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처럼 소속을 분리해 놓으면 집단행동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었다.

노비들은 날마다 가장 먼저 일어났다. 그리고 주인의 감시를 받으며 집안 잡일에서부터 농사 등 생산 활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노동을 도맡아 하였다. 출산 후 수유기에 있는 노비는 유모(乳母)로 발탁되어, 자신의 아이를 제쳐두고 주인집 아이에게 먼저 젖을 물렸다. 젊고 예쁜 노비는 밤이면 주인의 욕망 앞에 몸을 내주기도 하였다.

어느 시대나 최하위 생산계층의 처지는 비슷해

노비들은 주인과 그 가족이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도 최대한 안락하고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밑천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정작 노비 자신들은 죽도록 일해도 재산을 가질 수 없고, 원하는 곳에서 살 수도 없었다. 배우자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고, 사랑하는 자녀도 주인에게 빼앗겨야 하였다. 그럼에도 전란이나 위험에 처하면 제 목숨을 걸고 주인을 구하는 충직한 노비도 있었다. 물론 주인을 해치고 멀리 도망치는 반노(叛奴), 또는 역노(逆奴) 또한 있었다.

그러던 16세기 이후, 극심한 자연재해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 조선 정부는 일정량의 곡식을 납부하면 노비를 해방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른바 납속책(納粟策)이다. 이로써 어떻게든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있던 노비들은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납속가격은 더욱 낮아졌다. 그에 따라 해방되는 노비들이 많아졌고, 노비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그들 노비의 빈자리는 새경을 받고 일하는 머슴이 차지하게 된다.

19세기 말에는 본격적으로 노비 제도의 틀을 깨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양반 감투도 사고 팔리는 세태와 농민반란으로 뒤숭숭한 분위기에 노비들도 스스로 신분 해방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리하여 1886년(고종23년) 노비세습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그 매매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1894년,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노비 제도를 비롯한 조선의 신분 제도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수천 년을 이어 온 노비 제도의 관성을 쉽게 멈출 수는 없어, 한동안 노비는 사라지지 않았다. 또한 해방된 노비들도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그들은 헐값의 임금노동자로 편입되었다.

오늘날에도 신분 제도는 암암리에 살아 있다. ‘노동유연성’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국가와 자본의 합작품으로 탄생한 비정규직은 새로운 신분 서열의 끝단에 서 있다. 같은 노동자 계급이라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신분 차이가 엄연히 존재한다. 임금 수준이 신분을 결정하는 사회에서 정규직의 63퍼센트 정도(2007년 기준)의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이야말로 이 시대 최하위 생산계층이다.

그리고 어느 시대나 최하위 생산계층의 처지는 별로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부당한 착취에 시달리다 보면 사람은 곧잘 ‘시한폭탄’으로 변한다. 부리는 자가 조심하지 않고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다 보면 어느 순간에 그 폭탄은 터지고 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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