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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황희 정승의 분배주의 경제관
일자리는 무한정 늘릴 수 있나?

2008/09/05 ㅣ 박남일 (잡글노동자)

‘일자리 창출’이라는 말은 이제 선거 때 으레 등장하는 붙박이 공약으로 자리를 잡았다. 중앙정부든 지방자치단체든, 국토를 마구 파헤치는 개발 사업을 할 때에는 ‘경제 활성화’와 ‘고용창출’이라는 명분을 꼭 내세운다.

근래 ‘한반도 대운하’ 추진 논리에도 일자리 창출이라는 말이 슬그머니 끼어든 바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고용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실업(失業)에 대한 공포가 모든 경제인구의 심리에 스며있다는 뜻이다.

노동을 할 생각도 있고 또 그럴 능력도 있지만, 그 능력에 걸맞은 일자리를 얻지 못한 상태를 실업이라 한다. 이러한 실업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려고 시도한 사람은 마르크스와 케인즈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산업예비군(産業豫備軍: reserve army)이론으로 실업이 발생하는 원리를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토지, 건물, 기계 등과 같은 고정자본(불변자본)의 비율은 높아지는 반면 노동력에 지급되는 임금 등 가변자본의 비율은 줄어드는데, 이에 따라 잉여노동인구가 발생한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실업군(失業群)을 산업예비군이라고 칭하며, 인건비를 낮추어 더 높은 이윤을 창출하려는 자본가의 욕망이 결국은 산업예비군을 낳는다는 주장을 폈다.

한편 마르크스가 죽은 해에 태어난 케인즈는 ‘유효수요’라는 개념으로 실업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화폐이자율이 높고 소비가 줄어들면 투자도 감소하여 실업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업률을 낮추고 고용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화폐이자율을 낮추거나 소비를 촉진시켜야 하는데, 케인즈는 그 해결책으로 공공사업 및 사회보장 등에 의한 소득재분배를 주장하였다.

엄격한 청백리의 표상 황희

백성의 일자리를 진정으로 걱정한 인물은 조선 역사 속에도 있으니, 이른바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으로 알려진 황희(黃喜, 1363~1452) 정승이 그이다. 오늘날로 치면 모범 공무원, 즉 티 없이 맑고 깨끗한 관리를 일러 청백리라고 한다. 다산 정약용에 따르면 청백리란 ‘봉급 외에는 아무것도 받지 않고, 먹고 남은 것은 집에 가지고 가지 않으며,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갈 때는 한 필의 말로 조촐하게 가는 자’를 말하는데, 조선조를 통틀어 이러한 조건에 가장 부합되는 청백리는 황희 정승이라고 한다.

황희는 무서울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 이른바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었던 황희였지만 그는 평생 시골 마을의 생원 집보다 못한 작은 기와집 바닥에 거적때기를 깔아 놓고 살았다.

비좁고 낡은 그의 서재에서는 노비 아이들이 황희의 수염을 잡아채며 놀았다. 어떤 아이는 한지를 펼쳐 놓은 서안에 올라가 오줌을 누기도 하였다. 그럴 때 노정승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여종을 불러 오줌에 젖은 한지를 말려 오라고 하였는데, 여종은 그를 힐끗 치어다보며 예사로 말대꾸를 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황희는 노비와 아이들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휴머니스트였다. 하지만 그는 힘 있는 관리나 자기 가족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들이댔다.

예컨대 육진을 개척하고 돌아온 병조판서 김종서가 병조의 재물로 원로대신들에게 푸짐한 음식을 장만하여 내놓았을 때, 황희는 김종서에게 나라의 재물을 축냈다고 불호령을 한 뒤 병조의 실무를 맡은 관리 몇을 불러 흠씬 두들겨 패 버렸다. 당연히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 일이 있은 뒤 김종서는 자신의 집에서 준비한 음식으로 또 한 번 대신들을 대접하였다. 김종서는 이번에는 ‘나라 것’이 아닌 ‘내 것’으로 준비한 음식이니 거리낄 게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황희는 서릿발을 세웠다.

“그대가 사사로이 음식을 장만하여 이렇듯 올리는 것은 무엇을 뽐내고 과시하고자 함이오? 관료 사이에 사사로운 정이 거듭되면 그 정으로 인해 질서가 문란해지고 바른 법을 시행키가 어려워지는 것이오. 오늘 병판의 죄는 신료들의 기강을 해이하게 한 것이니 죄를 아니 물을 수 없을 터, 정2품 당상관을 욕보일 수는 없으니 대신 음식을 주관해 온 그 하인을 하옥하도록 하라!”

너무 야박한 게 아니냐고 충고하는 맹사성 등의 관료들에게 황희는 또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내 좀 심하게 하는 편이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늙었습니다. 머지않아 김종서가 우리 자리에 앉을 것인데 지금 그를 가르치지 않으면 언제 가르치겠습니까?”

“관리는 오직 녹봉으로만 살아야 한다”

그런 황희의 청백리 정신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그의 아들이 기와집을 신축했을 때였다. 아들의 부인은 초라한 초가에 살며, 이십여 년 간 여기저기 삯바느질을 해 주고 그 품삯을 모아 새로 작은 기와집을 지었다. 그리고 잔치를 벌였다.

아들 내외의 초대를 받은 황희는 비록 남루한 옷이지만 단정하게 차려입고 잔치에 갔다. 그러나 새로 지은 기와집 앞에 이른 황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들 내외를 불러놓고 물었다.

“그만 한 집을 지으려면 수월찮은 돈냥이나 들었을 터인데 어디서 났느냐?”

아들이 대답하였다.

“이 사람이 그동안 삯바느질로 여러 양반 댁에 옷을 지어 주고 푼푼이 번 돈입니다.”

그러자 황희의 입에서 날벼락이 떨어졌다.

“너도 이 나라의 관리인데 사사로운 돈에 욕심을 내었더냐? 관리란 나라에서 내리는 녹봉으로 사는 법. 며늘애가 바느질을 했다는 것은 곧 남의 바느질 일감을 그만큼 뺏은 것이 아니더냐?”

아들과 며느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든 열심히 일하여 잘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 아니냐고 항변하고 싶었을 게다. 황희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일하는 그만큼 남의 생계가 줄어든다. 관리의 집안에서 다른 수입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부정의 여지와 욕심과 혼탁함이 생겼음을 뜻하는 것이야. 새로 늘린 건물은 모두 헐어버려라. 그동안 남의 일감을 오래 빼앗아 왔으니 그만큼의 일감으로 모두 되돌려 주어라.”

아들 내외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한편 황희 정승이 실제로 가난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6년간의 유배에서 풀려난 황희는 세종으로부터 직첩과 과전(科田)을 돌려받았다. 50년 넘도록 관직을 지키며 영의정만 18년을 지낸 인물이 실제로 가난했을 리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황희는 가진 것이 없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평생 무서운 의지로 자신을 혹독하게 담금질하며 ‘청빈’을 이미지 전략으로 삼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옳다.

그렇다면 왜 그런 전략이 필요했던 것일까. 당시 명나라에서는 재상 호유용이 일으켰던 반란 때문에 재상이라는 직위를 없애 버린 상황이었고, 당연히 신권은 약해졌다. 사대나라 명의 조정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조선의 양반관료들도 미리 몸조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힘 있는 실세 재상보다는 책잡히지 않을 만큼 청렴한 인물을 재상으로 내세웠고, 황희가 바로 그 적임자였던 것이다. 그렇게 재상의 자리에 오른 황희는 더욱 청렴하고 사심 없는 태도를 지킴으로써 명나라 발(發) 정치 파동에 휘둘리지 않고 신권을 지켜냈다는 것이 바로 이 ‘이미지설’의 요체다.

일자리 숫자보다 중요한 건 일의 내용과 보수

그런데 황희의 청렴함이 설령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이미지의 결과물이라 하더라도, 공직자로서 훌륭한 그의 면모는 다른 데 있다. 바로 그의 경제관이다. 황희의 경제관에 따르면 공직자는 녹봉만으로 살아야 한다. 분배주의 원리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는 당연한 소리다.

만약 공직자가 재산 증식에 눈을 돌리게 되면, 십중팔구 거기에서 부패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무리 자본이 만능인 사회에서도 공직자만큼은 녹봉으로 만족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는 오랜 문명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얻은 귀중한 교훈이다.

그 아들 내외의 기와집 신축 사건에서 볼 수 있듯, 황희는 분배주의 경제관을 지니고 있었다. 한 사회에서 유통되는 재화는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군가의 몫이 늘어나는 만큼 다른 누군가의 몫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제로섬 게임의 경제 논리를 황희는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더불어 그는 일자리 또한 무한정 늘어나는 것이 아닌, 나누어 가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케인즈나 마르크스보다 수백 년이나 앞선 시대에 황희는 일자리, 또는 일거리의 독점으로 인한 백성의 실업을 진정으로 걱정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위정자들 대부분이 ‘일자리 창출’을 말한다. 하지만 문제는 ‘일자리’의 숫자가 아니라 ‘일거리’의 내용, 즉 턱없이 낮은 임금과 불안한 고용 상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의 산물인 비정규직 문제에 둔감한 지금의 위정자들을 보면, 그들은 진정으로 백성의 생존 문제를 염려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새삼 황희 정승이 그리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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