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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빼앗긴 자들

2007/07/19 ㅣ 유윤영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마누라도 없고 심지어는 그 흔한 여자 친구도 없는데,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니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한다.
“여보, 어서 일어나요. 오늘도 지역인민위원회 회의에 불참하면 우린 이 동네에서 쫓겨날지도 몰라요.”
때로 어제나 오늘이 다르지 않고 내일도 그저 그럴 것 같을 때,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고, 뭐 신나는 일이라도 없을까 눈을 부라리고 둘러봐도 전혀 신나는 일이 없을 때, 가끔 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다. 집에서 나올 때, 버스에서 내릴 때, 심지어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조차, 아 망할놈의 이 세상과 완전히 다른 세상에 내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공상과학소설이나 영화가 SF(Science Fiction)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최신의 과학적 지식을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과 무관한 경우가 더 많다. 어떤 의미에서 SF 장르의 작품은 우리의 사고가 상상력을 통해서 얼마나, 어느 정도까지 그 한계를 확장할 수 있는가를 실험하는 일종의 사유 실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 일정한 반성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의 배경이 미래 사회건, 심지어 외계의 어떤 행성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사회적 조건을 완전히 무시하고 진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미래는 초월적 관점에서 관조할 수 있는 어떤 미지의 상태가 아니다. 예술적 상상력에 의해서건 이론적 조망에 의해서건 제시된 미래 사회가 의미있는 것은 그것이 현재의 존재 조건에 대한 반성적 투사이기 때문이다.

<빼앗긴 자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가능한 미래에 대한 성찰을 제공해준다. 어느 먼 우주에, 지구에서 11광년 떨어진 서로에게 달(moon)인 ‘아나레스(Anarres)'와 ‘우라스(Urras)'라는 이름을 가진 두 행성이 있다. 우라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같은 자본주의 체제인 반면, 아나레스에는 개인의 자유와 개인들 간의 진정한 연대가 사회적 삶을 형성하는 곳이다. 우라스의 노동자들은 서로에게 행운을 빌 때 이렇게 인사말을 건넨다고 한다. “아나레스에서 다시 태어나길!”
우라스의 아나키스트들은 “권력의 종언을 위해” 싸웠지만, 혁명은 실패했다. 우라스의 세계정부가 아카키스트들에게 달로 이주할 것을 제안함으로써 혁명투쟁은 막을 내린다. 우라스의 지배자들은 정부의 전복보다는 그들의 달을 혁명가들에게 내어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이 고도의 문명,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 높은 생산성과 빠른 수송력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정된 경제와 고도로 산업화된 기술의 산물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착한 아네레스는 낙원이 아니었다. 건조하고 춥고 바람부는 곳이었으며, 생물은 물고기와 더 이상 진화하지 못한 꽃이 없는 식물이 전부였다. 아나레스는 황량한 먼지 사막일 뿐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선택하여 아나레스에 정착한 수백만의 영혼들은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아나키스트들의 공동체. 그 곳에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상호협력이라는 원칙 외에는 어떤 법률도 없다. 자유로운 연대라는 원칙 외에는 어떤 정부도 없다. 그곳에는 주식시장이나 광고, 비밀경찰도 없고, 성직자도 없으며, 무기제조업자도 없는 곳이지만, 동시에 다른 많은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소유하는 자들이 아니라 나누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이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흥미롭게 읽히는 것은 인간의 존재와 삶의 문제를 관념이 아니라 삶의 실제적인 토대인 사회 구조에서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이 실천적인 의미를 가지는 소설이다. 아나레스의 언어에는 소유격이 없다. 그래서 이건 내 것이고 저것은 너의 것이라는 표현 대신, “난 이것을 쓰고 넌 저 것을 쓴다”는 식이다. 아무도 자신의 집을 소유하지 않으며 아무도 누군가에게 어떤 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개인은 직업에 따라 공동생활을 하며 반려자가 생기면 두 사람이 생활할 수 있는 이인실을 신청하면 된다. 아이들은 강제는 아니지만 일정한 나이가 되면 마을의 교육관에서 공동생활을 한다. 아나레스에는 일과 놀이가 같은 단어다. 그래서 아이들도 수업이 끝나면 어른과 같은 일을 하며,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로 인식된다. 뭐니 뭐니 해도 아나레스의 매력은 성(性)이나 종교를 빗댄 욕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옥에나 꺼져라!“는 식의 욕이 없다. 아이들은 사춘기가 되면 자유로이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것이 동성애든 이성애든. 단지 절제의 미덕만이 요구될 뿐이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현재 상태가 전혀 나아지지 않을 거라면 우리가 살아가야할 이유가 있을까? 아나레스에 정착한 아나키스트들이 부닥친 가장 큰 문제가 중앙집권화였다는 것은 개인과 전체, 나아가 개인과 개인의 연대가 단지 머릿속의 관념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나레스라가 이상적인 상상의 공동체가 아니라 현실적 삶의 공동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변화와 변화를 갈망하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많은 SF 소설이나 영화가 미래 사회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존재 조건에 대한 반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추어 볼 때 이 소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대단하다고고 할 수 있다. 수백년, 혹은 수천년이 지난 미래에도 여전히 자본가가 지배하는 사회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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