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운동권 대학생의 자취방에서 학습이 한창입니다. 그때 구석에 놓여 있는 쌀가마 위로 바퀴벌레 한 마리가 기어오르고 있습니다. 그 모양을 보던 한 학생이 말합니다.
“저 바퀴벌레는 과연 끝까지 오를 수 있을까요?”
그러자 학습을 지도하던 선배의 대답.
“저 놈은 그럴 만한 역량이 안 돼!”
지난 80년대에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농담입니다. ‘역량’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어야 살아나는 농담입니다. 당시에는 말투만으로도 운동권 학생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후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여, 변혁운동의 겉모습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변혁운동 울타리 안에서 쓰는 용어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바뀐 게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회의할 때 쓰는 자료 문건이 아니라 대중에게 읽히기 위한 글이라면 조금 더 쉬운 생활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용어, 뭔가 심오한 지식이 눌리고 다져진 듯 압축된 용어는 대다수 민중의 가슴에 파고들기 어렵습니다.
언어에도 계급이 있습니다. 우리 말글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배계급의 말글과 민중의 말글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말(한자)이, 일제강점기에는 일본말이,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는 영어가 지배계급의 착취도구로 요긴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변혁운동에 몸을 던져 지배계급과 맞서 싸우는 우리들 자신이 역설되게도 지배자들의 용어를 마구 쓰는 일이 더러 있습니다. 자본과 권력의 나팔수인 언론의 말투,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후세에 전하는 일로 먹고 사는, 이른바 관변 학자들의 유식하고 고상한 말투를 무심결에 흉내는 것입니다. 우리 변혁운동의 이념이 주로 일부 양심적인 지식인의 말로 전달됨으로써 빚어진 현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론이 현실을 비추는 것이라면, 그 이론은 현실에서 살아 숨 쉬는 용어로 표현되는 것이 좋습니다.
한 장짜리 글쓰기에서 어휘력의 문제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얼마나 많은 어휘를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는가를 말합니다. 흔히 ‘어휘력이 풍부하다’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둘째는 알고 있는 어휘를 얼마나 적절하게 쓰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글쓰기에 익숙지 않은 분들은 머릿속에 저장된 어휘의 양이 적다는 사실만을 스스로 탓합니다. 요컨대 간단한 홍보 유인물 한 편을 쓰면서도 “어휘력이 부족하여 글쓰기가 어렵다.”고 호소하는 동지들이 뜻밖에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두막집 한 채 지으면서 벽돌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으려 하는, ‘재료’ 욕심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어휘력이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어휘력이란 저장능력이 아니라 활용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휘력 향상을 위하여 국어사전을 통째로 외울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말과 글은 살아서 움직입니다. 나아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그런 것처럼 새끼를 치기도 하고, 가뭇없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오직 살아있는 현장에서 익힌 언어만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고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이들은 ‘육두문자’를 들을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들 귀에 들려오는 것은 맞선 보는 청춘 남녀가 어색하게 연출하는 말이거나, 내로라 여기는 이들이 고상한 척 내뱉는 말들입니다. 하지만 포장마차 주인 귀에 들려오는 것은 주로 감정적이고 격한 말들일 것입니다. 비탄과 한숨과 기쁨과 슬픔이 원색적으로 묻어나는, 심하면 깨진 유리조각처럼 날이 선 말들로 포장마차의 밤은 얼룩지기 마련입니다. 진실한 말은 깨끗하고 세련된 곳에도 있고, 추하고 너저분한 곳에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글을 쓰면서 제각기 익숙한 말로 생생하게 표현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사전 속에 잠들어 있는 수십만 단어가 아니라, 살아서 꿈틀대는 단어 몇 백 개가 더 소중합니다.
어휘력이 풍부해야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닙니다. 지나치게 풍부한 어휘가 정확한 문장을 쓰는 데 도리어 방해가 되는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좋은 문장은, 군더더기 말을 버리고 다듬은 뒤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글쓰기에서 어휘력 빈곤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글쓰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풍부한 어휘력이 아니라, 오히려 문장에 꼭 필요하지 않은 어휘를 기꺼이 버릴 줄 아는 용기일 것입니다.


「한장짜리 글쓰기」 연재를 시작하며

1. ‘한 장’의 미학(美學)

2. 소재를 도구로 주제를 설득하라!

3. 좋은 글이 갖추어야 할 여섯 가지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