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호에 이어 같은 제목으로 글을 게재한다.)


과도적 요구란?

일반적으로 노동자계급이 내거는 요구에는 일상적인 개량적 요구와 자본주의자체를 부정하는 궁극적 요구가 있다. 요구가 자본주의의 틀자체를 넘어서지 않는 것이냐 넘어서는 것이냐라는 기준에 의해 전자는 보통 최소강령적 요구로 불리고 후자는 최대강령적 요구로 불린다. 가령 노동력의 판매가격인 임금의 인상요구가 자본주의체제의 골간을 형성하는 임노동제의 철폐요구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최소강령적 요구라면 임노동제의 철폐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요구는 최대강령적 요구에 해당한다.
과도적 요구는 이러한 기준틀에 의하면 독특한 특성을 갖는다. 과도적 요구는 그 자체로는 최대강령적 요구는 아니지만 용어자체가 함축하듯이 최대강령적요구로 발전해가는 전망을 갖는 요구이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 자체로서는 자본주의의 틀을 벗어나는 요구는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이러한 요구로 발전해가려는 전망속에서 제출되는 요구이다. 예를 들면 은행과 기간산업의 국유화요구는 그 자체로 최대강령적 요구가 아니다. 그러나 이 요구는 투쟁의 발전속에서 주체의 노력에 의해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요구로 발전해갈 수 있는 요구이다. 이런 의미에서 은행과 기간산업의 국유화요구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같은 최대강령적 요구로 접근발전해갈 수 있는 ‘과도적인’ 요구이다.
과도적 요구는 종종 이행기적 요구라는 용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는 아마 과도적이라는 용어의 영어 표현인 ‘transitional\'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행기적’이라는 말로 번역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이행기적’이라는 용어는 몇가지 혼동을 초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용어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이 용어는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로의 이행기라는 것을 연상시키는데 이 이행기에 상응하는 요구는 고유한 의미에서는 굳이 이행기적 요구라고 표현할 필요가 없는 최대강령적 요구이다. 가령 노동자 국가의 수립은 이행기에 필수적인 것인데 노동자국가의 수립은 이미 최대강령적인 과제인 것이다. 이러한 최대강령적인 것과 달리 굳이 과도적인 요구라는 것을 제출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최대강령적 요구를 다른 용어로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대강령적 요구로 접근발전해가는 요구를 이론적 실천적으로 적극적으로 고민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행기적 요구’는 적절한 용어가 아니며 과도적요구라는 용어가 문제의식을 올바로 반영하는 용어라고 판단된다.


과도적 요구를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하는 이유

해방5호에서 이미 주장하였듯이 한국의 노동운동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이후 뒷전으로 밀려난 궁극적 목표를 쟁취하기 위한 활동을 다시 되살리고 이를 강화해야 한다. 지금은 자본주의를 공격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을 의식적으로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의 복원과 강화속에서 궁극적 목표를 쟁취하기 위한 활동과 개량투쟁을 올바로 결합해 가야 한다.
그런데 사회주의자들은 여기서 한걸음 더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 그것은 과도적 요구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궁극적 목표를 쟁취하기 위한 활동을 더욱더 전진시키는 것이다.
현시점에서 과도적 요구를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자본주의의 객관적 위기가 계속확대재생산되며 구조화되고 그 결과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삶의 고통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현체제에 대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불만과 저항은 계속 고조되어가고 있지만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주체적 상태는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명확한 의식과 적극적인 반대행동으로까지 발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객관적 상태는 위기상태에 있지만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주체적 상태는 그 객관적 위기에 비해서 높은 수준으로까지 발전하고 있지 못하다. 이로 인해 객관적 위기는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폭발적인 분출을 예상하게 하고 있지만(자본주의 이데올로그, 선전가, 소부르주아개량주의자들조차 이 가능성에 우려를 갖고 있다.) 실제의 양상은 제한된 분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과도적 요구의 제시는 주체적 상태를 빠른 속도로 상승시키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과도적 요구는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상태의 비조응, 괴리를 빠른 속도로 극복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현재 한국자본주의는 90년대 중반 이후 구조적 위기상태에 처해있다. 이 구조적 위기상태에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삶은 빠른 속도로 파탄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이 중 가장 두드러지게 표출되고 있는 현상은 노동자계급전반이 급속한 속도로 비정규직화되고 노동자계급의 다수가 7, 80년대의 무권리상태로 내팽개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는 빈곤의 급속한 확산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의 전개는, 가장 먼저 고통을 겪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절한 저항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대자동차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목숨을 걸고 크레인점거투쟁에 돌입한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를 전형적으로 대표하는 투쟁이다.
구조적 위기에 처한 한국자본주의에 의해 초래되고 있는 사회전반의 급속한 황폐화, 이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처절한 저항을 자본의 옹호자와 소부르주아적 개량주의주의자들은 사회의 양극화라는 ‘점잖은’ 말로 포장해내고 있다. 그러나 사회의 양극화는 자본주의체제 자체의 위기를 호도하는 말일 뿐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자본이 노동자계급에 대해 자행하고 있는 사실상의 전쟁이며 노동자계급의 저항은 최소한의 삶을 지키기 위한 방어책인 것이다.
먼저 전쟁을 걸어온 것은 자본쪽이다. 노동은 이 전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저항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 전쟁의 자본주의적 본질을 점차 인식해가고 있다. 또한 이 전쟁이 전쟁을 도발한 자본에 대해 노동쪽이 자신을 재정비하여 공세로 전환하여 자본에 승리하지 않는 한, ‘노동해방’을 쟁취하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식해 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부분적인 인식의 수준을 아직은 넘지 못하고 있고 명확하지도 못하다. 문제의 근원이 자본주의에 있다는 것을 부분적으로 그리고 불명확한 형태로밖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체제에 대한 열망과 행동 역시 그러하다.
과도적 요구는 이러한 인식의 빠른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 과도적 요구는 인식의 비약적 성장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주요한 방책이다. 과도적 요구를 제기하고 투쟁하자는 이유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과도적 요구의 핵심적인 역할 - 가교적 역할

과도적 요구를 제기하자는 문제의식에서 알 수 있듯이 과도적 요구제시와 투쟁이 갖는 핵심적인 역할은 현실의 주체적 상태에서 출발하되 이 상태를 빠르게 상승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표현하면 가교(다리)의 역할이다. 현재의 주체적 상태와, 객관적 위기에 조응하는 주체적 상태, 의식, 조직 수준 사이의 간극, 격차를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이 과도적 요구의 핵심적 역할이다.
과도적 요구는 노동자계급의 현재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고려하되 현재의 상태가 갇혀있는 한계지점을 돌파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있다. 과도적 요구는 노동자계급의 현재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고려하되 현체제의 틀에 의해 질곡되어 있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력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현시점에서 과도적 요구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호에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