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연립정부 제안이 민주노동당에 일정한 파문을 일으켰다. 일단 최고위원회와 의원단이 ‘연정 불가’라는 당론을 확인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당 안의 불씨가 다 사그라졌다고는 볼 수 없다. 2007년 대통령 선거 때까지 연정 변수는 계속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종결’된 게 아니라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게 있다. 지금 민주노동당에 문제가 되는 것은 연정 ‘일반’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부·여당이 제안한 연정은 첫째 좌우연정이다. 자본주의(그 최신판인 신자유주의)의 운명에 대해 입장이 전혀 다른 우파정당과 좌파정당 사이의 연합이다. 둘째는 좌우연정 중에서도 좌파 주도가 아니라 우파 주도의 연정이라는 것이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의 단순 세력 비교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연정의 제안 주체가 정부·여당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외국, 특히 유럽에서 이와 비슷한 사례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만큼 좌우연정이라는 것은 흔치 않은 사례다. 더구나 그 중에서도 좌파가 소수파로 우파 주도 정부에 참여한 사례는 더욱 흔하지 않다.

100년 전의 연정 파동 - 밀르랑 입각 사건

그래도 우리가 참고할만한 사례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좌파정당이 아직 원내 소수파에 머물러 있던 1890～1900년대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현재의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 나타난 바 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좌파정당이 성장하기 전에 보수파 대 자유주의의 대립 구도가 정착됐다. 또한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서 자유주의 세력의 ‘개혁’ 정부가 들어섰다. 개혁 정부는 원내·외에서 보수파에 대항하기 위해 사회주의·노동운동의 지지를 필요로 했다. 어떻게 보면 노무현 정부·열린우리당이 민주노동당의 의석과 지지율에 눈독을 들이는 상황과 비슷하다 하겠다.
이탈리아 사회당 의원들은 졸리티 수상이 이끄는 자유주의 정부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둘 사이에는 상당한 수준의 정책 공조가 이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가 연정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사회당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당내 좌파가 의원들의 친여당 성향을 제어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연정 수립까지는 아니어도 그에 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이 유명한 밀르랑 입각 사건이다. 이것은 밀르랑이라는 한 사회주의 의원이 우파 정부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연정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한국과 같은 대통령제 국가에서, 그것도 선거 시기가 아닌 집권 중반기에 연정이 추진된다면 그것은 야당 국회의원 몇 명의 장관 기용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현재 우리의 연정 논란에 가장 직접적인 참고가 되어준다.
밀르랑 입각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프랑스에서는 1893년 총선을 통해 역사상 처음으로 50여 명의 사회주의 성향 의원들이 의회에 진출하게 됐다. 하지만 소규모 사회주의 정당들과 무소속 사회주의자들이 난립한 상황이어서 좌파 단일정당의 결성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1896년부터 단일정당 창당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중심에 무소속 사회주의 의원 A. 밀르랑이 있었다.
한편 1894년부터 프랑스 사회는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으로 들끓었다. 프랑스군 참모사령부 내에서 주요 정보가 적대국 독일로 유출되는 사건이 적발되었는데, 참모사령부 내의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를 별다른 증거도 없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사건의 범인으로 몰아 군법회의에서 유죄를 선고한 것이다. 이에 대해 급진공화파와 사회주의 세력은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고 나섰고, 보수파는 군부의 권위를 방어하고자 이에 맞섰다. 처음에는 반드레퓌스파가 상황을 주도했다.
하지만 점차 드레퓌스의 무죄를 입증하는 여러 증거들이 드러나 여론의 추이가 드레퓌스파 쪽으로 이동한다. 급기야 1899년에는 급진공화파가 보수파를 배제한 개혁 내각을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여기에 밀르랑 의원이 전격적으로 노동부 장관으로 입각한 것이다. 개혁 정부에 힘을 몰아주고 이 기회에 노동자의 권리를 향상시키는 조치들을 취하겠다는 것이 입각 취지였다. 단일정당 결성을 추진하던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은 이로 인해 삽시간에 밀르랑의 입각을 지지하는 진영과 반대하는 진영으로 양분되었고 대혼란에 빠졌다.

한 명의 ‘좌파’ 정치인이 부르주아 국가기구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밀르랑을 둘러싼 논쟁에는 이성적 이유와 정서적 이유가 함께 존재했다. 우선 후자부터 보면, 개혁 정부라고는 하지만 그 국방부 장관은 1871년 파리 코뮌 당시 시민군을 잔인하게 진압한 갈리페 장군이었다.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노동자들을 학살한 장본인과 한 정부에서 일할 수 있는가? 많은 이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좀 더 논리적으로는 이런 질문이 제기되었다. 좌파 장관 한 명이 도대체 부르주아 계급 정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밀르랑의 입각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그래도 개혁 성향의 정부이기 때문에 일정한 역할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반면 반대파에서는 ‘좌파’ 노동부 장관이 노동자의 권익을 향상하기는커녕 부르주아 정부의 포로가 돼 노동자 탄압의 주구 역할만 할 것이라 보았다.
결국 이 논란 때문에 좌파 단일정당 창당은 난관에 부딪히고 밀르랑 지지파와 반대파는 각각 따로 사회당을 창당했다. 사회당이라는 당명을 내건 두 개의 정당이 등장한 것이다.
그럼 논쟁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는가? 역사는 입각 반대파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밀르랑 장관은 점차 노동운동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입장을 보였고 1903년경이 되면 노골적인 반노동적 태도를 취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입각 지지파 사회당조차도 당대회를 통해 밀르랑에 반대하는 입장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두 사회당의 통합을 가속화했다. 그래서 1905년 드디어 통합 사회당이 출범했다. 당을 주도한 것은 당연히 입각 반대파였다. 밀르랑의 입각을 지지했던 장 조레스 등의 지도자들은 밀르랑 사건의 책임을 지고 신당의 창당 과정에서 주변적인 역할만을 맡았다. 또한 신생 프랑스 사회당은 당 소속 의원들의 독주를 막는 장치로서 ‘당직 공직 분리제’를 채택했다. 밀르랑 사건이 남긴 상흔이 그만큼 깊었던 것이다.
한편 밀르랑은 노동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1910년의 철도파업 진압에 군대를 동원하는 등 반노동적 행보를 거듭하다가 결국은 우파로 전향하고 만다. 그는 좌파와 노동자의 ‘파견 부대’가 되겠다며 입각했으나 실제로는 우파의 ‘볼모’가 되었을 뿐이다.
‘볼모’가 될 수밖에 없는 건 바로 국가기구의 생리 때문이다. 좌파 의원이 노동부 장관이 되었다고 해서 국가의 노동정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재무부 장관을 비롯해 내각의 다수를 차지한 우파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데 노동부 장관만 친노동 정책을 편다는 것은 헛된 꿈일 뿐이다. 게다가 선거나 내각 구성과는 상관없이 제 갈 길을 묵묵히 가는 관료기구의 문제가 있다. 노동부 장관이 그나마 자기가 원하는 정책을 추진하려면 기존의 관료기구를 철저히 개혁해야 한다. 하지만 내각 내에서도 고립되어 있는 좌파 장관의 말발이 고위 관료들에게 먹히기란 쉽지 않다. 100년 전에 밀르랑을 압박하고 결국은 변질시키고만 국가기구의 이 냉정한 논리는 지금도 결코 변하지 않았다.

지금 민주노동당이 정작 해야 할 것

이 대목에서 이렇게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오히려 의식적으로 좌파 장관이 연정 내에서 싸우고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파의 한계를 대중적으로 폭로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그러나 이것은 ‘여당’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오해해도 한참 오해한 것이다. 한 정당이 정부 구성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 정부의 모든 책임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당의 정책을 관철시켰는지 여부만을 놓고 유권자의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자기 당이 지지하지 않은 정부 정책에 대해서도 연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자멸의 길을 선택하자는 것인가? 자살하는 건 자기 자유 아니냐고 할지 몰라도 남에게까지 동반 자살을 권유하는 건 확실히 범죄다.
민주노동당은 당분간 연정 자체를 놓고 왈가왈부할 게 아니라 당의 빈 부분들, 즉 당 강령 정신에 입각한 한국사회 변혁 청사진의 제시, 이에 입각한 대중정치운동, 노동계급 내 토대 구축 등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노무현 정부가 민주노동당에 연정 제안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당에 이러한 지점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당을 쉽게 흔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공백들을 극복하는 데 주력하는 게 이러한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가장 근본적인 처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