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 지방선거가 끝났다. 이번 지방선거는 사이비 개혁을 추진해왔던 열린우리당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었던 동시에, 대다수 대중들에게 열린우리당과 실질적으로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비쳐진 민주노동당에 대한 질책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현재 당내에서는 이번 선거결과가 시사하는 엄중성에 대해 그다지 깊은 고민이 없는 듯하다. 투표일 이전이든 이후든 현재 당을 지배하고 있는 전반적인 분위기는 나태와 안일이며 당지도부는 더더욱 그렇다. 이번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심각한 자기반성과 노선수정을 하지 않는다면 당의 미래는 더 이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까지 무기력하게 보수정당의 틈바구니에서 반사이익만을 노릴 셈인가?


패배를 솔직히 인정하라

일단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이번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패배가 아니라 답보일 뿐이라는 둥 단지 약간 ‘아쉬운’ 결과일 뿐이라는 둥 진지한 반성을 회피하는 물타기성 평가가 지도부를 비롯한 당내 주류세력들에 의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에게 책임이 돌아올 것이 두려워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명백한 패배를 패배라고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면 실패의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고 올바른 방향을 잡아나가기를 기대한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패배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 우리는 일단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2002년에 비해 4배 정도의 후보가 출마해놓고서 당선자는 2배도 채 되지 않는데도 패배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 특히 기초의원의 경우, 2002년에 비해 출마자는 6배로 늘었음에도 당선자는 기껏 2배 가량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그나마 당선자의 상당수는 새로 도입된 기초의원 비례대표제의 수혜자이거나 중선거구제 하에서 턱걸이로 당선된 사람들이다. 2002년처럼 기초의원 선거가 비례대표 없이 소선거구제로 치뤄졌다면 이번 선거결과는 그때보다도 더 못한 당선자 수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에, 그동안 구청장을 장악하고 있던 울산 북구와 동구 두 곳 모두에서의 패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당선자 수가 전부는 아니다. 우리의 후보들이 민중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대안을 제대로 선전하다가 패배했다면 당장은 낙선했을지언정 우리는 충분히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의 패배가 그런 것이 전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진보대연합 노선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진보개혁세력 교체론이니 뭐니 해가면서 어정쩡하게 열린우리당 2중대 노릇을 하다가 열린우리당과 동반참패한 것이 현 상황의 냉정한 본질이기에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연합이 아니라 독자성이 필요하다

게다가 이런 어정쩡함은 이번 선거 시기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내진출 이후 지난 2년간의 정치활동 전반에 걸쳐 노동자당으로서의 독자성보다는 그 실체도 불분명한 개혁공조 따위가 더 중심이 되었는 바, 이번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에 실망한 이들이 민주노동당에도 표를 주지 않은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민생파탄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열린우리당과 확실한 대립각을 세우지 못하고, 중요한 사안사안마다 열린우리당과 ‘공조’한 정당에 대해 사람들이 도대체 무얼 믿고 표를 주겠는가?

가령 비정규직 법안도 그렇다. 현재의 비정규직 법안 논의가 명백한 개악임을 확실히 하고 개악반대로 열린우리당과 전면적 대결구도를 이끌어내지 않고 어정쩡하게 내용협상에 들어가서 당이 얻어낸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대중들은 세부내용 하나하나를 따져가며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싸워야 할 때 확실히 싸우지 않으면 대중들은 다 비슷비슷한 놈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다.

지난 임시국회 마지막날의 법안처리 협조도 마찬가지다. 부동산 관련 세제의 경우, 지금보다 약간 낫다는 이유로 별 생각없이 열린우리당 손을 들어주었는데 아예 아파트 원가공개와 공영개발, 1가구 1주택을 못박아서 집값을 확실히 떨어뜨리는 수준(이 정도 되면 거꾸로 강력한 지지층이 생긴다)도 아니고 수혜자도 불분명한 어정쩡한 ‘개혁’에 우리가 굳이 찬성할 필요가 있었을까? 조그만 성과에 연연하기보다는 이대로 가면 안된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언발에 오줌누기 식인 열린우리당 법안을 비판하는 쪽이 장기적으로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그나마 주민소환제를 관철한 것은 성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 역시 국회의원에 대한 소환제까지 도입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열린우리당의 불철저함을 확실히 폭로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전당적 토론으로 정치노선을 수정해야

예전의 윤광웅 국방장관 해임반대에서부터 최근의 진보개혁세력 교체론까지 그간 당의 정치노선 전반에 암묵적으로 깔려있었던 사고방식은 열린우리당과 우리 당 간에 일정정도는 ‘동질성’이 존재한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비단 민족주의적인 현 지도부만이 아니라 원내의 의원들이나 현 지도부에 비판적인 사민주의자들까지 상당정도로 공유하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자잘한 것 몇 개는 비슷할 지 몰라도 이라크 파병에서부터 한미FTA까지 큰 줄기에서는 완전히 적대적임을 그들도 인정할 것이다. 큰 방향 자체가 적대적이면 그건 말 그대로 적일 뿐이다. 실체도 불분명한 부스러기 ‘개혁’을 위해서 저들과 공조하는 것보다는 모든 사안에서 정부여당과 확실한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당의 독자성을 위해서도 낫고 대중들의 지지를 얻는데도 훨씬 더 유리하다. 한나라당 따위보다 훨씬 더 철저한 ‘야당’ - 사이비 개혁에 장단맞추지 말고 진짜 인민들의 편에 선 야당으로 자리잡을 때만이 우리 당은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이번 지방선거의 엄중한 교훈이다.

이제 원내외를 총괄하여 그간 당의 정치노선에 대한 전당적인 토론을 수행하자. 그리고 자유주의자를 비롯한 온갖 사이비 진보개혁세력과 확고히 구별정립되는 당의 독자적인 정치노선을 재설정하자. 개혁정당과의 공조가 아니라 모든 부르조아 보수정당과 철저히 대립하는 변혁적 진보정당노선으로 당의 정치노선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자. 당장은 이것이 현실을 무시한 듯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만이 당의 미래를 진정으로 담보하는 길이다.


제대로 된 싸움을 시작하자

그간 당의 정치노선에 대한 토론과정에서 지도부에 대한 인적 쇄신 등 책임론도 일정하게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의 혼선에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다면 지도부든 그 누구든 확실하게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단지 지도부 몇 명 바꾸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미 말했듯이, 자유주의자들과의 일정한 공조노선은 민족주의자들만이 아니라 그에 비판적인 이른바 ‘범좌파’ 내에서도 상당정도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치노선 그 자체의 수정없이 지도부만 바꾸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노선을 바꾸는 것이 우선이며 인적 쇄신은 그에 동반되어 이루어져야 할 문제일 뿐이다.

이제 제대로 된 당내논쟁을 시작하자. 당혁신이랍시고 맨날 제도니 조직체계 따위만 붙잡고 늘어지지 말고, 당의 노선과 정치적 포지션에 대해 토론하고 혁신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조직에 합당한 논쟁거리 아닌가? 또한 당 외부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이제야말로 그간의 어정쩡함에서 벗어나 변혁적 야당으로서 자유주의자들을 포함한 모든 부르조아 보수정당들과 제대로 된 싸움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마침 싸움거리도 이미 저들이 제공해 놓았다. 한미FTA - 민족주의자든 사민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정파를 떠나서 당내 모든 세력들이 동의할 수 있는 싸움 아닌가? 여기서부터 우리는 저들과 확실히 결별해야 한다.

결론은 이거다. 당내든 당외든 이제 한 번 제대로 좀 싸워보자는 것이다. 언제까지 물에 물탄 듯 흐리멍덩하게 지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