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병호 의원의 비정규 법 ‘수정’안

당 내외에서 단병호 의원의 비정규 법 수정안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그런데도 단병호 의원은 수정안 철회는 커녕, 절차상 문제만 있었다는 사과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수정안이 최초의 권리보장입법과 내용상 차이가 없으니 오해를 풀라는 것이다.

그러나 단병호 의원의 수정은 단순하게 절차상의 문제 수준이 아니라, 비정규직 철폐라는 원칙을 져버린 것이었다. 특히 ‘엄격한 사유제한과 파견제 폐지’라는 당론이 ‘원내전술’에 의해서 훼손되었다는 데에 더욱더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런데도 오히려 단병호 의원이나 민주노동당 비대위는, ‘원내’에서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변명을 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보좌관은 ‘환노위’를 취재하는 기자들의 논조가 바뀌었다느니, ‘법안심사소위’에서 사유제한을 쟁점으로 부각시키지 않았느냐라며 성과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의회주의’가 아닌가! 변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국회 ‘안’에서 모든 문제를 풀려고 하다가 원내 전술에서 오류를 범했음이 드러날 뿐이다.

그렇다면 의회주의가 아닌 의회 전술은 과연 무엇인가? 100년 전 러시아 볼세비키의 의회 전술을 곱씹어보도록 하자.


볼세비키 의원단, 입법이 목표가 아니었다!

볼세비키는 1906년 1차 두마(지금 우리의 경우로 치면 국회)에서는 적극적인 보이콧 전술을 펼쳤다. 당시는 1905년에 터진 1차 러시아 혁명이라는 정세였기 때문에, 두마는 노동자와 빈농의 혁명적 열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짜르가 던져준 떡고물에 불과했다. 게다가 국민의 반수 이상에게 선거권을 주지도 않았고,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도 아니었다.

하지만 1907년으로 넘어가면서, 혁명은 실패하였고 운동은 퇴조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짜르의 역공도 가공할 정도가 되어, 탄압을 피해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오히려 볼세비키들은 3차 두마에서부터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비합법화된 당으로서는 합법 수단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두마였고 의원단이었다.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따라 ‘전술은 24시간 안에도 바뀔 수가 있다!’ 레닌의 전술 원칙을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볼세비키들은 두마에서 독자 법안을 제출하고 의회 연단을 적극적인 선전선동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동시에 의회 밖에서 전개되는 투쟁에 의원단이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할 것은 볼세비키 의원단은 법안은 발의했어도 절대로 입법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멘세비키가 입법 활동에 참가하자고 의원단에게 호소하자 레닌은 이를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볼세비키 의원들은 레닌의 이 충고를 따랐다. 그 이유는 명분과 실리 두 가지 모두 때문이다. 자본가계급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겠다는 명분도 지킨 것이요, 어차피 원내 소수 세력인 볼세비키로서는 입법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실리도 챙긴 것이다.


<프라우다> : 볼세비키에게는 대중일간지 <프라우다>가 있었다!

볼세비키와 볼세비키 의원단이 합법과 비합법 투쟁을 통일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프라우다>(우리말로 진실)라는 볼세비키의 대중용 기관지의 역할이 컸다. 단순하게 비교를 해본다면, 구독자 일부만 보는 민주노동당의 기관지 진보정치와 달리, <프라우다>는 그 규모나 영향력에서 가히 한겨레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일간지 형태에 대중적으로 배포되는 <프라우다>를 통해서 볼세비키와 볼세비키 의원단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했던 것이다. 의원단이 연단에서 짜르 체제의 비민주성과 인민의 생활고를 폭로하고 노동자 빈농의 요구를 주장하면, 곧 <프라우다>를 통해서 전국적으로 전파되었다. 당시에는 인터넷은 커녕, TV, 라디오도 없었으니, 신문 그것도 대중용 일간지였던 <프라우다>가 갖는 영향력은 막강했었던 것이다.

반면에 지금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여론 환기를 위해서라며 당밖의 부르주아 주류 언론을 과도하게 활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일부 의원들은 인터넷 이슈가 되기 위해서 깜짝 발언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스타가 되기 위해서 언론에 주목받으려고 몸부림을 쳐야하는 연예인의 처지와 비슷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러시아 볼세비키에게는 <프라우다>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볼세비키, 의원단의 오류를 당이 정정할 줄 알았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마지막 교훈은, 볼세비키 역사를 보면 의원단 활동에 잘못이 있을 경우, 이를 시인할 뿐만 아니라 당의 의사결정 회의에서 정정되었다는 것이다. 관건은 의원단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당 자체에서 그 잘못을 정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이다. 그것이 노동자 정당이 의회주의를 뛰어넘었는가 아닌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결정적 근거이다.

볼세비키는 오류를 정정했던 역사를 남기고 있다. 반면에 민주노동당은 그러지 못했다. 최근 중앙위원회에서 “단병호 의원의 수정안을 즉각 철회하고 비정규 법 개악 저지 투쟁에 나서자”는 결의안에 대해서 48명만이 찬성하여 부결되고 말았다. 이것은 ‘열우당 2중대’ 사건, ‘조건부 연정’ 사건과 함께 민주노동당이 또다시 노동자 정당이라는 자기 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한 사건이 되었다.


아무리 <프라우다>가 없다지만...

이번에 단병호 의원이 수정안을 제출한 데에는 연내 입법이라는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목표에 말려들어간 측면이 없지 않다. 또한 법안심사소위에 과감하게 불참하지 못한 이유 역시, 볼세비키와 다르게 ‘입법이 목적인 국회의원’이라는 부르주아 공식을 과감하게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동유연화를 기조로 하는 열우당의 법안을 놓고 심사하는데 \'권리보장\'을 주장하는데 근본적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일부에서는 상반기 임시국회 때와는 달리, 하반기 정기국회에서는 민주노동당이 상임위를 점거해봤자 무조건 비정규 법 개악을 강행처리하겠다는 열린우리당의 의지가 확인되었다면서, 그래서 시간을 끌기 위한 지연전술이 필요했고, 사유제한을 쟁점화하기 위해서 법안심사소위에 참여해서 수정안을 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물론 이와같은 원내전술을 펼친 이유는 투쟁 동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회 밖에 투쟁 동력이 없다고 해서, 국회 안에서 원칙을 훼손할 이유는 하등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악안이 물타기되면서 추후 개악시 결과적으로 개악에 일정정도 동참한 꼴이 될 뿐만 아니라, 시간을 끌어서 투쟁동력이 살아나기는 커녕 투쟁전선에 있는 투쟁하려고 노력하는 주체들의 사기를 꺾게 되어, 결국 그 어떤 명분도, 실리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최근에 등원을 거부하고 장외투쟁에 나선 한나라당을 보면,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국회도서관에 있는 레닌전집을 읽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볼세비키와 다를바 없이 10명(이제는 9명)의 국회의원을 가지고 있는 민주노동당이 원내에서 운용할 수 있는 전술의 폭은 매우 좁다. 원칙까지 져버리면서 유연하게(?) 전술을 펼치기 보다는, 아무리 <프라우다>가 없다지만 여전히 대중투쟁이 대안이고, 원내전술은 그 대중투쟁에 복무해야한다. 어찌보면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특보조차 한정적이었던 민주노동당에게 “우리에겐 <프라우다>가 없어요”라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비정규직 철폐냐 아니냐에 대한 국민투표를 하자는 것과 같은 대중운동의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과단성 있게 투쟁하지 못한 게 문제이다.


비정규직 철폐 투쟁의 원칙을 훼손한 권영길 비대위원장과 단병호의원

민주노동당 최초 권리보장입법안(작년 7월)과 비판받고 있는 수정안(12월 8일) 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