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의 딸도 빈부격차를 거론하고, 복지사회를 주장하면서, 어느 순간, 한나라당 주류와 고소영 클럽을 제외하고는 정치인들의 화두가 복지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 노무현 정권 때 한자리를 차지했거나, 당시 주류에 편입되었던 사람들이 주도한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인사들이 제기한 1만1천원 더 내고 건강보험 하나로 무상의료(실제로는 90%)을 실현하자는 운동이 등장하며 점입가경에 이르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러한 주장 혹은 운동은 소부르주아 운동의 본질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소부르주아들은 본디 대중의 후진성에 영합하여 운동을 전개하여 대중을 헷갈리게 하여 힘을 뺀 다음 자본에 동의하게 하고 그 대가로 정권의 품으로 들어가 마른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다 또 팽 당하거나 정권을 잃으면 다시 노동자 민중을 기만하는 정책을 가지고 포장하여 행세를 한다. 이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이 말이 헛말이 아니다.

“건강보험 하나로” 주장이 실제 건강보험 기금의 수입과 지출을 제대로 계산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과연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이 운동을 통해 현재 존재하는 의료 관련 사보험을 고사시키겠다고 장담하고 있지만, 이는 현행 보험시장의 성격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이른바 의료보장 보험상품들 중 순수보장성 상품들은 건강보험에 기생하는 존재들이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60%에 이르기 때문에 나머지만 책임지기에, 값싼 가격의 보험상품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장성이 90%까지 확대되면 이러한 보험상품들은 허약한 사회안전망을 근거로 좀 더 값싸고 혹하는 서비스를 내세워 여전히 활개칠 것이 분명하다.

사실 이 운동은 아이디어 자체가 허약하다. 결국 완전무상의료가 아니기 때문에 일본에서 시행하고 있는 본인부담금 상한제가 도입되었다. 즉 90%까지 보장성을 확대해도 연간 본인부담금이 100만원이 넘을 경우에는 그 이상을 내지 않도록 하는 본인부담금 상한제도가 언급되고 있다. 이러다보니 차라리 본인부담금 상한제도 하나만을 도입하는 것보다도 못한 주장이 되어버렸다.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이 그 논리의 불합리성이나 상상력의 빈곤도 문제지만 이 주장이 초래할 피해도 상당하다. 사실 현 시국은 무상의료가 제기되기에 어느 때보다도 유리한 조건임은 사실이다. 이번 지자체 선거의 주요 쟁점 중의 하나였던 무상급식이나 무상교육의 확대가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이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무상의료의 문제를 떠올릴 수 있게 하였다. 복지가 화두가 될 만큼 빈부격차와 빈곤층의 증가는 보수정치권에도 무언가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처럼 대중에게 인기 있을 것 같은 주장을 심사숙고 없이 떠드는 것은 운동적 성과를 엉뚱한 방향으로, 종국에는 성과마저 유실되게 할 위험이 있다. 어떠한 개량적 조치도 그것을 돌이킬 수 없게 하고, 더 큰 요구로 상승되게 하기 위해서는 기본방향이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점에서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은 그 동안 노동운동이 주장해온 한국사회 진화방향의 주요 뼈대를 부정하고 있다.

첫째, 사회화 문제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한국의료시스템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온 지나친 시장성이 언급되고 있지 않다. 사적의료기관(민간의료기관)이 병상기준으로도 80%가 넘는 문제, 그래서 의료행위가 영리행위가 되고, 병원장이 경영학 전공자가 되는 것이 유행이 된 의료산업의 민중수탈적 성격이 은폐되고 있다. 이는 심하게 말하면 무상의료를 내세워 의사들의 배는 채워주고, 서민들의 주머니는 털겠다는 것이다.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은 시민사회운동이 갖고 있는 속성을 표현하고 있다. 시민사회운동은 자본주의 운영의 핵심적 부분(사적 소유의 절대화, 시장의 조절기능, 자본의 통제)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시민운동 방식의 운동이 범하는 오류의 심각성은 근본적 변화를 회피해가는 소극성과 비겁함에 있다. 즉 요즘처럼 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의 위기가 극심한 상황에서 최소한의 투쟁 요구인 의료비의 자본가 부담 및 국고지원 확대 요구가 당위론적 구호이며 쟁취가능성이 없다고 스스로 결론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적의료기관의 공공의료기관화를 외면하고, 기금과 서비스 구조를 노동자들이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포기하고 있다.

둘째, 사회운동에서 노동자들의 주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노동자들의 투쟁을 과소평가하고 폄하한다.

사태가 이렇게 된 데에는 이 주장을 제기하는 집단이 갖고 있는 노동에 대한 몰이해, 혹은 적대감이 작용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서 노동의 주도성이 전혀 제기되고 있지 않다. 실제 기금의 출연자인 노동자의 요구가 무엇인지,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의 문제, 의료서비스체제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조직된 노동자(간호사 등 병원의 주요 종사자들)의 지위에 대해서 언급이 아예 빠져있다.

20년 동안 사회보험노동자들이 주도적으로 투쟁해 온 의보통합운동은 국가지원과 보편적 의료보장의 확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의보통합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던 소위 진보적 학자집단은 시민운동으로 편입되었고, 시민운동의 속성상 자본의 요구와 정권의 요구에 따라 변질되면서, 노동자의 고용안정을 추구하고 의료서비스의 공공화를 추구하는 노동운동과 대립했다. 특히 통합징수공단 주장처럼 조합원을 자르고 관리운영비를 줄인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를 탄압하는 지경으로까지 발전했다. 통합징수공단은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노동자들을 경쟁하게 하여, 민영의료보험과 의료민영화를 저지하고자 하는 전선을 무력화시켰다. 반면 징수통합반대 4대보험공투본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정권은 감히 제주도 등에서 민간의보도입을 시도하지 못했다. 노동자들의 투쟁력은 사회변화의 속도와 방향을 결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결국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은 무상의료 실현의 주동력인 노동운동의 요구와 투쟁과 괴리되어 이들은 그들만의 운동으로 변질되었다.

반노동적인 이 주장은 당연히도 의사들의 수입을 끝까지 노출시키지 않고 반대로 노동자들을 비용절감이라는 명목으로 압박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 주장이 실현된다고 가정해보자. 건강보험가입자의 입장에서 보면 보험료인상까지 해서 건강보험의 재정을 무상의료수준까지 올려놓았는데, 수지균형이 쟁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현재의 의료서비스체계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지출항목에서 관리비용(건강보험관리공단의 노동자 임금을 포함해)이나, 약가에 비해 병원자본과 의사들의 수입은 상대적으로 노출이 되지 않는다. 사회보험노동자나 병원노조의 임금인상요구는 눈에 바로 들어와서, 이들의 노동권이 건강보험 재정안정의 이름으로 억압을 받지만, 의사들과 병원자본의 몫인 수가는 노출이 되지 않는다. 건보심의위에서 설왕설래가 이루어질 때 가끔 언론에 노출이 되겠지만 딱 그 정도일 뿐이다.

셋째,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은 이른바 민주노총의 임금투쟁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사회임금투쟁의 포기와 다름없다. 무상의료니 무상교육 주장은 기업임금이 아니라 사회임금, 다시 말해 노동자들의 소득을 사회가 보전함으로서 실질소득을 사실상 높여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구책을 모색하는 방식은 이러한 노동운동의 전략적 방향을 농담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회임금 주장이 현장의 투쟁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사회적 합의주의를 초래하는 개량적 요구라는 비판이 있는데, 이제 이것마저 내동댕이친 것을 보면 노동운동의 개량화는 이제 그 끝을 가고 있다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넷째,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은 의료서비스 방식을 보험방식으로 고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무상의료의 실현방식을 놓고, 조세방식으로의 전환이냐 보험방식의 강화냐 하는 간단치 않은 논쟁을 해왔다. 그리고 그나마 있을 수 있는 합의는 지금의 보험방식에서 정부의 재정기여도를 높여서, 조세방식으로의 전환의 토대를 강화하자는 정도였다. 그러나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은 보험방식을 사실상 추인하고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아무도 그들에게 이러한 권한을 주지 않았고, 따라서 이들의 주장은 중요한 뼈대는 다 내던진 채 대중의 귀를 간질이는 얄팍한 주장이 되었다.

2008년 세계공황이 몰려온 이후 자본가들이 위기의 모든 책임을 노동자 민중에게 떠넘기는 판에 노동자 민중이 건강문제를 스스로 책임져야한다는 논리를 주장하는 것은 백기투항과 마찬가지이자 자본주의의 모순과 책임전가에 대한 투쟁을 원천봉쇄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자본가들의 논리를 앞장서서 변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떤 논리로 치장한다 하더라도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은 반동적인 운동이다. 반동적인 운동은 철회되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