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을 조장하는 증오스런 자본주의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새삼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교도관에 의한 성추행으로부터 국회의원의 성추행, 게다가 천인공노할 아동에 대한 성폭행, 살인까지 잇따르고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계급투쟁이 시작되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가 시작된 이래 남성들은 자기부인의 성을 독점하면서도 다른 여성에 대한 성적 도발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방식으로 이를 정당해 왔다. 하지만 성폭력의 대상이 아동에까지 이르러서는 남성지배사회도 스스로 위기를 느끼며 비탄과 규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폭력을 유발하는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약자에 대한 폭력체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국가와 국가,계급과 계급, 민족과 민족간에 폭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나라마다 절망의 세대가 등장하고 이들에 의한 사회폭력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나라마다 일벌백계나 재범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한 낙인행위를 통해 이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으나 이는 지극히 위선적이다. 적어도 사회보장이 잘되고 살벌한 경쟁에서 자유로운 나라에서 재소자가 하나도 없음을 표시하는 교도소에 백기를 다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것은 살기가 괜찮으면 범죄율이 떨어진다는 간단한 공식이 타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의 지위를 위협하는 썩어가는 자본주의
많은 남성이 여성을 성적대상으로만 보고, 성적인 매력으로 여성을 구별하는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남녀차별의 인습에다 자본주의 배금주의까지 더해지고, 게다가 신자유주의 차별로 여성의 지위가 떨어지면서 사태가 더 악화되고 있다. 비정규직 여성의 확대, 이혼율 급등에 의한 모자가정의 빈곤화, 그리고 마땅한 일자리가 부족함에 따라 축소기미가 보이지 않은 성매매 관련산업 등 이땅에서 여성은 저주받은 세상의 절반이다. 특히 번창하는 성매매산업은 남성들로 하여금 여성의 자기성결정권에 관한 의식을 희박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이 만인이 공분하는 아동에 대한 성폭력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국민에 대한 감시통제가 대안이 될 수 없다
한나라당 등 보수정당들이 나서서 아동성폭력을 막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방안은 결론적으로 감시통제기구의 강화다. 인권위원회나 일각에서 여기에 우려를 표하는 것은 감시와 통제 기구가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사형이라는 극형을 파렴치범의 존재 때문에 옹호하면, 정치범도 사형을 당하는 일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아동성폭행범이라는 파렴치범을 감시, 통제하기 위해서 전자팔찌나 GPS감시체제 등이 도입된다면 공권력은 새로운 감시체제를 확보하게 된다. 이것이 정치적 상황변화에 따라 엉뚱한 대상에게 정치적 박해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국민에 대한 감시, 통제를 능사로 하고, 그러한 행위에 도덕적, 윤리적 망설임이 없는 사람들 입에서 나올 이야기가 뻔하지 않은가?
성범죄자의 재범율이 높은 상황을 간과할 수 없다면 임시조치로서 아동성범죄자의 신분을 주변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조치도 검토할 수 있다. 아동성폭행범에 대해 사회의 관리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관할경찰서는 물론이고 학교선생님이나 지역안전책임자에게 신원을 공개하는 조치는 가능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조치는 범죄자에 대한 심리치료를 충분히 할 수 있고, 그 성과가 입증되는 시점까지 임시조치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빈곤과 차별에 대한 투쟁, 인간존엄성을 강화하기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
성윤리가 한 사회, 혹은 계급, 계층의 윤리적 잣대가 되는 것처럼, 성범죄는 한 사회의 건전성을 가늠하는 잣대라 볼 수 있다. 이는 역으로 범죄를 양산하는 사회가 유지되는 한 성범죄도 줄어들 수 없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사회적 조치들이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시급히 여러 조치들이 취해져야 한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원활하게 하는 사회인프라를 확대하는 것은 물론, 교육과정에서도 양성평등교육이 의무적으로 행해져야 하고, 인권교육도 강화되어야 한다. 여성과 아동을 보호하는 것은 신사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인간에 대한 예의로서 강조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이 스스로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썩어빠진 자본주의에 대항해 투쟁의 주체로 나서는 것이다. 잘못된 사회체제와 투쟁하는 여성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존중할 뿐만 아니라 여성일반에 대한 남성들의 존중심을 높인다. 비정규직으로, 그리고 저임금으로 몰리고 있는 이 땅 여성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최악으로 몰고 있는 자본주의와 타협할 수 없으며 오로지 자본주의를 분쇄함으로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뿐이다. 노동운동 그 자체가 여성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노동운동의 강화가 노동운동의 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줄 것이다. 여성노동자로서 스스로를 자각하고 사회를 진정으로 해방시킬 주체로 나서는 여성노동운동의 새로운 흐름이 소원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