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이나 영화관이 없는 곳에서도,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빈민가 뒷골목에서도 축구공은 구른다. 이 굴러가는 물체에 대한 인간의 반사적 관심은 인종과 문화를 뛰어넘은 지 오래다. 그리하여 축구는 단 백 년 만에 세계적인 통일성, 즉 글로벌스탠더드를 가장 확실하게 구축하였다. 이처럼 축구가 지구를 정복한 힘은 무엇일까?

축구의 역사는 무척 길다. 발로 공을 차는 놀이는 기원전 7∼6세기 무렵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또 로마시대에는 군인들 사이에 공놀이가 널리 보급되었는데, 그것이 전쟁 기간에 영국까지 전파되어 근대 축구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까지 축구는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을 위한 엘리트 스포츠였다. 그러다가 말 잘 듣는 ‘모범적인’ 노동자를 육성하려는 부르주아 계급의 열망에 힘입어 노동자계급의 스포츠로 확산되었다. 병기창고 노동자들로 구성된 ‘아스날’, 철도노동자로 구성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같은 팀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월드컵을 ‘쩐의 전쟁터’로 만든 국제축구연맹

한편, 국제 축구경기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선수들 국적문제와 경기규칙 통일을 위해 1904년 에는 프랑스 등 유럽 7개국이 국제축구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4년마다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주관하게 된다. 드디어 월드컵이 탄생한 것이다. 그 후 축구 글로벌스탠더드의 바람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세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초창기에 월드컵은 각국 독재자들의 억압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1934년에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는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 앞서 “우승하지 못하면 모두 사형”이라고 선수들을 위협했다. 이탈리아 선수들은 다행히 우승하여 목숨을 건졌다. 1978년 아르헨티나 군사 정부는 월드컵 준결승에서 페루를 매수하였다. 그 결과 아르헨티나 팀은 결승전에 진출하고 우승컵을 안았다. 1970년대 초 브라질 군부 독재 정권 또한 월드컵을 이용하여 억압을 정당화했다. 오죽하면 축구 황제 펠레는 “고문, 살인 등으로 군부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에 나는 브라질 대표 팀 유니폼을 입고 싶지 않다."고 항변하였다.

한편 1974년에 금권 선거를 통해 FIFA 회장에 등극한 주앙 아벨란제와 더불어 FIFA는 국제 협잡꾼들의 사교장이 되었다. 아벨란제는 월드컵을 아디다스 같은 스포츠용품 업체들의 장사판으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아벨란제는, 스페인 파시스트 잔당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 회장직을 독점한 사마란치와 함께 ‘라틴 마피아’로 불리게 된다.

아벨란제의 뒤를 이어 월드컵을 더 치열한 ‘쩐의 전쟁터’로 만든 사람은 스위스 태생의 제프 블래터다. 1998년에 8대 회장에 취임한 블래터는 선거 과정에서 뇌물수수, 공금유용 등 온갖 추악한 부패 혐의를 받았지만, 내리 3선을 역임하면서 한껏 수완을 발휘하면서, FIFA 자체를 이익에 충실한 거대 다국적 기업으로 바꾸었다. 이처럼 아벨란제에서 블래터로 이어지는 FIFA의 독재자들은 축구공에 애국주의의 옷을 입혀 최고의 상품으로 만든 뒤, 그것을 다국적 기업에 점점 비싸게 팔아먹어 왔다. 그럼에도 아직도 많은 지배자들은 월드컵을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려 한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의 그늘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도 그런 현상은 어김없이 드러났다. 남아공은 2010 월드컵 대회를 위해서 약 40억 달러를 지출하였다. 주민들 등골을 뽑아 마련된 비용이다. 그러면서도 남아공 당국은 경기장 주변에 살던 빈민들을, 케이프타운에서 30킬로미터나 떨어진 황무지의 임시 촌락으로 강제 추방하고, 철제로 만든 방 한 칸에 대가족 전체를 밀어 넣었다. 지난해 6월에는 월드컵 공사와 관련된 뇌물 사건에 의문을 제기한 남아공축구연맹 전 부회장 지미 모할라가 총격을 받아 숨진 사건이 있었다. 아직도 국민의 35%가 영양실조 상태인 남아공에서 월드컵을 둘러싸고 얼마나 추악한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단전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런 국제 행사 개최국에 대하여 FIFA는 철저하게 단물만 빨아먹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남아공월드컵에서 FIFA는 텔레비전 중계권료만으로 최소 35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FIFA 파트너 업체나 월드컵스폰서 업체로부터 얻은 수입이나 광고수익은 집계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FIFA의 수익에서 월드컵 개최국 국민에게 돌아가는 돈은 한 푼도 없다.

블래터는 이번 월드컵으로 남아공에 일자리가 많이 생기고 교통이 개선되어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혜택을 볼 것이라고 했지만, 그로 인한 일자리는 공사장 일용직 15만 개가 전부였다. 고속전철 개통으로 오히려 많은 택시기사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대형 마트의 등장으로 영세 상인들도 생계수단을 잃었다. 월드컵 경기장 주변에는 노점상이 금지되고, 세금을 면제 받은 FIFA 협찬 기업의 상품만 넘쳐났다. 특히 블래터 회장의 조카가 최대 주주인 월드컵 관련 호텔 예약 업체는 개최 지역 호텔 숙박권의 3분의 1을 매점하여, 10배의 가격으로 되파는 부도덕한 상행위를 벌였다.


‘대-한민국’이라는 함성의 허망함

우리가 보고 있는 월드컵 경기와 광고, 그리고 그 속에 자리 잡은 애국주의 같은 메시지들은 모두 권력과 돈에 대한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요컨대 한국 대표 팀 주장 박지성의 오른쪽 가슴에는 태극기가 아닌 나이키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국가 이전에 선수들은 다국적 스폰서 업체를 위해 싸우는 전사들이다. 그것은 우리가 축구장이나 길거리에서 외치는 ‘대-한민국’이라는 엇박자 구호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2010남아공 월드컵에서 한국이 16강에 진출함으로써 남한의 자본가계급은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 어느 재벌사 연구소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월드컵 16강 진출의 경제적 효과'가 4조3천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가뜩이나 얄팍한 서민들 지갑에서 4조 3천억 원이 날아갔다는 뜻이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보면 월드컵은 한 순간의 즐거움 때문에 지갑을 더 가볍게 만드는 행사일 뿐이다.

한편 지금의 부르주아 정권도 한국의 월드컵 16강 진입으로 많은 이익을 챙겼다. 대중의 눈이 축구에 쏠려 있는 사이에 지방선거 결과는 잊혀갔고, 4대강 사업, 천안함 사태 의혹에 대한 저항은 잠시 멈칫거렸다. 그 사이에 현 정권은 노동관계법 개악, KBS수신료, 의료민영화 등 수많은 살인적 정책에 대한 스텝을 밟았다. 그놈의 월드컵이 잠시 우리 눈을 가린 사이에, 그 그늘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