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생활이 궁극에 다라 생존이 여의치 아니할 새, 이런 전차로 어린 백수가 이루고자 할 배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실컷 펴지 못할 노미 하다. 이를 어엿비 여겨 새로 백수인권선언을 맹가노니 백수마다 쉽게 먹고 삶에 편안케 하고저 할 따름이다.』

작년 겨울에 출범한 전국백수연합의 백수인권선언문이다. 백수들의 연합이 생길 정도로 우리 사회의 청년 실업 문제는 심각하다. 대졸자 10명 중 4명이 백수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젊은이 두 명중 하나가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비정규직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소설의 등장인물은 백수와는 거리가 먼 전문직의 고독한 인간형이 주류였다. 소설이 자아와 세계의 갈등을 다루는 장르라고 했을 때 백수들만큼이나 이 사회의 문제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집단이 또 있을까. 아마도 그간 소설은 먹물들 곁에서 너무도 고고하게 내면의 세계로만 침잠했던 듯하다.

이런 문학계에서 현실의 문제를 특유의 재치 있는 입담으로 포착해내는데 주력하는 작가가 있으니 바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지구영웅전설>로 큰 인기를 얻은 소설가 박민규이다. 그가 최근에 펴낸 단편소설집 <카스테라>에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시대 청년들의 서글픈 이야기가 녹아 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알바생, 인턴 사원, 휴학생 등과 같이 유예된 신분의 사람들이다. 정규직 채용을 위해 동성(同性)인 상사의 성폭력에도 순순히 응하는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의 주인공,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편의점과 주유소 아르바이트 그리고 지하철 푸시맨노릇까지 하는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상고생(商高生), 전문대를 졸업한 뒤 일흔세 군데의 직장에 이력서를 넣었으나 취직에 실패하고 유원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 하세요 펠리컨>의 주인공 등이 모두 그러하다. 안정된 직장과 수입을 얻지 못하고 부유하는 이들의 모습은 청년 실업 인구가 60만에 육박하는 현실의 투명한 반영이라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사회로 진입하면서 깨달은 현실의 열악함에 “열심히 사는 거 외엔 달리 방법이 없는 게 아닌가.”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하는 체념의 제스추어를 취한다는 점에 있다. 이것 역시 현실을 살아가는 청년들이 암울한 현실을 돌파할 방법이 달리 없기에 취하는 체념과 순응을 투명하게 반영해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체념은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환상성을 통해 합리화된다. 예컨대 왕년의 운동권 출신으로 지금은 농촌 공동체 운동을 하고 있는 <코리언 스텐더즈>의 ‘기하 형’은 정체불명의 외계인과 UFO로 인해 농사를 망치게 된다. 한 때 동지였던 이들의 변절과 정부의 무책임한 농업 정책에는 대응할 방법이 있지만 외계인의 습격에는 체념하는 이외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지는 대왕오징어의 기습이나 영문도 모른 채 당하는 헤드락은 이의 연장선상에서 읽힐 수 있다. 현실과 맞서 투쟁해야하는 순간에 환상의 영역으로 도피하는 이러한 모습은 작가가 혹시 패배주의에 빠진 것은 아닌지 우려하게 만든다. 물론, 이러한 무기력함 역시 견고한 사회 체제에서 비롯되는 것일 테다.

<카스테라>에 실린 10편의 이야기들은 박민규의 입담 덕분에 배꼽이 빠질 만큼 재미있다. 그러나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것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뜨거운 피를 사회에 빨아 먹히는 젊은이들에 대한 연민 때문일 것이다. 발랄한 문체만큼 세상에 맞설 수 있는 대담한 기백이 더해진다면! 박민규의 소설은 현실을 기가 막히게 포착해내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우면서도 본질적인 아쉬움을 남긴다. 환상의 영역으로 도피하지 않고, 현실 세계와 맞서 승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투쟁하는 이들의 몫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