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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태워 현실에 발언한 화가, 오윤

2010/09/14 ㅣ 김광수

오윤, 80년대 민중미술의 시대로 안내하다

올해 6월에 오윤전집이 나왔다. 1,2,3권인데, 2권과 3권은 그림책이다. 1권에는 오윤에 대한 평전이자 기록물들로 채워졌다. 그 글 중에는 오랫동안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졌던, 하지만 80년대에 사자후를 터트렸던 몇 안 되는 비평가들의 글도 실렸다. 성완경, 유홍준, 최열 들이 그들이다. 환쟁이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던 김지하의 글도 있어, 사뭇 감회가 새롭다.
오윤전집은 필자에게는 시간여행이다. 그것은 단절된 민중미술로의 향수이자, 시대정신을 대중과 소통코자 했던 “언어”로서의 미술에 대한 추억이다. 이명박정권에서 완장찬 딴따라 장관 유인촌에게 사임압력을 받았던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김윤수씨가 초대 관장으로 있던 서울미술관이나, 인사동 중심에 비록 지하층이나마 당당히 민중미술의 상설공간으로 자리했던 화랑 민을 오가며 민중미술의 적극적 소비자를 자처했던 필자에게 민중미술의 힘찬 아이콘이었던 오윤은 짧았던 내 젊음의 육신같던 존재였다. 그리고 오윤의 자리가 더 컸던 것은 그의 동지를 자처했던 판화가 이철수가 불교로 귀의해(?) 화랑 민에서 탱화도 아닌 달마대사 그림같은 것으로 사람들을 유인했던 96년도에 신혼의 아리따운 새색시와 2살박이 아이를 옆에 두고 화가의 면전에서 분통을 터트렸던 그 아쉬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리라. 화가에 대한 불경이 너무 컸던 탓인지, 그해 감옥을 가고, 민중미술은 내 머리에서 지워졌다. 아니 그 일련의 화가들이 내 기억속에서 사라졌다.

천재화가 시대와 교류하다

화가 오윤은 80년대를 열혈청년으로 넘어선 사람이 아니다. 죽음에 이른 86년도에 이미 불혹을 넘긴 나이였고, 86년도 7월에 인생을 마감했기에 86년 5월부터 시작된 질풍노도의 반독재투쟁을 막 경험하고 87년의 열매를 맛보지도 못했다. 80년대 민중투쟁이 점정을 찍었던 87년은 예상조차 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지만 화가는 죽기직전 3, 4년간 매년 50점에 달하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민중운동의 상상력을 강렬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80년대 오윤의 그림은 대학교 유인물에서 공장의 노보까지, 어는 곳에서나 투쟁하는 민중의 울림을 표현했다. 그는 시인 박노해와 마찬가지고 80년대 홀연히 등장했고, 자신을 한꺼번에 태워버렸다.

흔히 좋은 술이나 예술이 그렇듯이 화가에게도 숙성의 시간이 필요했다. 화가는 서울대 미대 학생이던 누이 오숙희의 절친이었던 김지하를 고3이었던 1963년에 만나, 그의 천재성을 한눈에 알아 본 김지하의 기대주였다. 화가는 서울대학교 미대에 들어가 사상적 저변을 확대하고, 단련하는 시절을 맞이한다. 이 시절 화가는 민중가요의 상징이 될 김민기를 비롯해 80년 민중문화운동의 주역이 될 사람들과 교우했다. 화가는 대학시절 임세택, 오경환, 강명희 등과 함께 김지하, 김윤수의 지원을 받아 이론적 작업을 통해, “현실 동인 제 1선언”을 69년도에 발표한다. 선언은 예술이란 현실의 반영이어야 하며, 고답적인 동양화는 혁신이 필요하고, 순수 추상의 형식주의와 새롭게 등장하는 팝아트 및 네오다다의 자연주의 역시 그 모순을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지적한다. 이에 반해 올바른 현실인식에 기초하여 전형성과 동시성을 확보하여 현실주의를 건설하고 이를 통한 민족미술 전통을 확립할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69년이면 의미심장하다. 시인 김수영은 68년도에, 그리고 시인 신동엽은 69년도에 작고했다. 두 시인 모두 문학의 현실참여라는 문제로 60년대 문단을 뜨겁게 달구던 사람들이다. 민중문학의 시대를 연 70년대를 코앞에 두고 작고한 두 시인은 시대정신의 바통을 죽음으로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 파문은 화가들에게 미쳤던 것이다.
그러나 선언을 미술작품으로 현실화하는 것은 좌절되었다. 결국 독재정권과 보수적인 교수들의 방해로 전시회는 무산되었고, 한국현대사의 대단한 이 사건은 70년대 민중미술을 시동하는데 실패하고, 10여년간의 침묵을 강요받았다.

71년도 늦깍이로 화가는 대학을 졸업하고는 10여 년 동안 서울과 경주를 오가며 술 잘먹고 잘노는 한량의 전형으로 여겨질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림은 나오지 않았으나, 화가는 그 시절을 치열한 모색으로 일관하였다. 생계를 위해 벽돌을 벽에 붙여 장식하는 전돌작업을 했지만, 민중들과 어울리면서 맑스주의를 공부하고, 삽화 등을 그리며 민중운동에 나름대로 개입하며, 노동과 학습의 채찍으로 스스로를 단련해 갔다.

또 하나의 혁명과 민중미술의 폭발

빨치산이 전멸되고 난 이후, 민중이 총을 든 초유의 사건이 광주에서 일어난다. 비록 1주일 남짓한 기간이지만 광주에서는 민중이 주인된 해방세상, 대동세상이 실현된다. 비록 광주항쟁은 전두환 일당의 학살로 귀결되지만 민중이 스스로 창출한 대동세상과 그를 좌절시킨 국가폭력이 가져다준 충격은 가히 광주항쟁전, 광주항쟁후라고 시대를 가를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80년 민중혁명의 현장이었던 광주시와 그리고 그 광주와 강력한 유대를 몸소 실천한 곳에서는 혁명의 충격을 예술적 충동으로 승화시킨 새로운 문화형식이 등장했다. 83년 광주시민미술학교의 등장은 민중이 예술의 생산과 소비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었다. 광주에서는 노래극이 등장했고 뒤이어 민중연희로 발전하였다. 광주, 전남출신의 걸출한 시인과 소설가뿐만 아니라 혁명광주에 고무된 수많은 예술가들이 광주로부터 시작된 민중투쟁의 시대를 노래했다.
민중미술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사건으로 여겨지는 “현실과 발언”은 80년에 혜성처럼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현실에 대한 발언, 억압된 민중과 곤궁한 삶을 표현한 그림들은 포장지하고 구별도 되지 않는 추상표현주의나 미 CIA와 록펠러 재단에 의해 과잉 평가된 팝아트류의 경박성을 거부하고 "시대정신을 표현하는 언어"로서 미술을 표방하였다. 그 주역중의 하나는 바로 오윤이다. 현실과 발언이 준비된 것은 79년 12월이지만 첫 전시회는 80년부터 시작된다. 전시회장에 전기를 차단해 촛불전시라는 별칭을 얻은 이 전시회에 오윤은 1회부터 5회까지 매년 작품을 현실과 발언전에 발표하였고, 그의 목판화가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오윤전집에서는 오윤의 목판화가 직접적으로 혁명을 표현하거나, 광주항쟁을 묘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화가를 당시 구호로서의 민중미술과 차이가 있었음을 애써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개인과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사고의 결핍을 표현할 뿐이다. 오윤은 혁명의 산물이고 또한 그가 의지와 무관하게 혁명적 열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혁명광주는 80을 넘긴 한국화가 박생광에게 동학도를 그리게 했으며, 새마을 지도자였던 지선스님을, 골프매니아 윤공희 대주교를 모두 운동권으로 만들게 하였다. 4.19가 없었다면 어떻게 우리가 "육법전서를 기준으로 하고 혁명을 바라보는 자는 바보다. 혁명이란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 할 터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개수작이냐"는 김수영이나 "껍데기는 가라"는 신동엽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인가? 오윤이 60년대 말부터 모색해온 언어로서의 그림이라는 뇌관을 80년 광주로부터 시작된 활활 불타는 예술창조의 에너지의 힘으로 터트려 민중미술의 폭발을 가져온 것이다.

예지자로서 화가, 또다른 오윤을 보고 싶다

80년대 민중미술의 주역이었던 신학철이나, 오윤, 김봉준 등에게는 시대를 뚫고 나가는 뚝심이 있었다. 탄압을 이겨내는 힘만이 아니라, 시대를 꿰뚫는 예지력으로 사람들에게 나아갈 바를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던 유홍준은 그런 민중미술로 제작한 슬라이드로 서사시를 보여주었다. 지금 현실과 발언이 제기했던 문제의식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삼성 리움미술관에 수백억짜리 그림, 아무말 없는 그림들이 쌓여있고, 반면 그림 투기열풍에 이땅의 미술시장은 규모가 거대해졌다. 그러나 화가의 발언권은 어느 때보다도 작아졌다. 화가의 발언권이 적어진건 그들의 그림이 언어로써 소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윤이 소원하던 언어로써의 미술은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속에서 더욱 고통받는 민중의 입으로 작동될 때 비로소 실현된다. 그림이 말하는 시대, 아니 말해야 하는 시대가 또 다시 오고 있다.


추신 : 오윤 그림에 대한 상념, 춤

오윤의 그림에 나오는 춤은 거의 남자가 추는 춤이고, 그 춤은 경상도에서 추는 덧배기 춤의 사위다. 옛날부터 소리는 전라도요 춤은 경상도라는 말이 있었는데, 동래는 바로 그 춤의 본고장 같은 곳이다. 그리고 오윤은 그 동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덧배기 장단에 맞추어 추는 덧배기춤은 남자들의 춤이다. 덧배기 장단은 가식없이 처음부터 척하고 찌르는 춤이다. 세상의 중심에 주먹을 들이대는 덧배기 춤은 혁명의 춤사위다. 그래서 그 춤그림이 사람들에게 울림이 있었던 것이다. 민중미술인데 춤을 그렸다는 식의 오윤전집의 평가는 그래서 좀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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