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30일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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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비극, 초라한 희극] 야성(野性)을 잃어버린 야당의 민주주의
박남일  ㅣ  2013년 9월 30일
지난 두 계절 동안, 박근혜 정권은 대선 후유증으로 인한 위기를 여러 가지 이슈로 돌려막았다. 야권은 물렁한 법에 호소했지만 별 소용없었다. 촛불을 들어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미 야성(野性)을 잃어, 인민의 지지를 업지 못한 야권 세력은 박근혜 정권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박근혜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지금 속이 터질 지경이다. 그런 와중에 ‘독재정권과 민주주의’라는 익숙하고도 해묵은 전선 구도가 부활했다. 마치 시계바늘이 3,4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하다.
물론 아직도 민주주의라는 말만 들으면 목구멍으로 뜨거운 체액이 넘어올 것 같은 사람들이 많다. 박정희에서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져온 30년 군부독재로 인한 깊은 상처 때문에 빚어낸 현상이다. 그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사람들에게 박근혜의 등장이 2차적 가해가 예상되는 공포 자체였을 것이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민주주의 위기’라는 말이 흘러나왔을 법하다.

이슈로 위기를 돌려막은 정권, 야성(野性)을 잃어버린 야당

상황을 복기해보면 이렇다. 대선에서 패배한 민주당은 불법 선거 개입을 문제 삼으며 국정원을 걸고 넘어졌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국정감사 등의 조치가 여의치 않자 거리에 나가 촛불을 들었다. 그러자 국정원은 죽은 노무현의 NLL 관련 발언을 건드렸고, 이에 분개한 통합진보당 등 민족주의 세력과 여타 친노 자유주의 세력이 촛불에 가세하여 더욱 시끄러워졌다.

민주당의 거리투쟁에 가세한 세력에 의해 촛불이 동네 골목까지 옮겨 붙을 기미가 보이자 국정원은 'RO내란음모사건'을 터뜨렸다. 그리고 민주당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가결해주고 말았다. 바람이 불기도 전에 먼저 쓰러지는 풀잎처럼, 민주당은 스스로 사상검증을 행했다. 그 결과 촛불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통합진보당을 걷어차 버림으로써 청와대와 국정원을 흐뭇하게 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정권에 의한 물 타기 이슈는 계속 생산되었다. 내란음모사건의 약발이 떨어지기 직전, 국정원은 현직 검찰총장의 사생활을 더듬어 ‘혼외자’ 의혹을 터뜨림으로써 유력한 언론매체들은 일제히 ‘선데이서울’로 전락했고, 그렇게 생산된 가십(gossip)성 이슈는 대중의 말초신경망을 타고 확대 재생산되었다.

국정원 촛불로 인하여 위기에 몰린 박근혜 정권은 온갖 추잡한 이슈들을 개발하여 위기 돌려막기에 성공했다. 그런 뻔뻔함에 빛나는 박근혜 정권 앞에서 야권은 한 대 때리고 두 대를 얻어맞는 싸움을 벌어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기 문란’이니 ‘헌정 파괴’니 하는 국가주의 논리에 갇혀, 하나나마나한 국정원 개혁이나 요구하는 야권 세력의 펀치는 맷집 좋은 정권에 별다른 위협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야권에서는 ‘민주주의 후퇴’니, ‘민주주의 위기’니 하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국민적 저항’을 운운하며 박근혜 정권에 경고를 보내는 준엄한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 하지만 그 역시 공허했다. 지금 나오는 민주주의라는 말에는 지난 시절의 그 가슴 울컥하던 감동이 없었다. 사실 야권에서 일컫는 민주주의는 핵심 권력기구인 국정원에 대한 통제 불능 상황을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국정원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 민주주의는 회복될 것인가.

야당의 민주주의는 ‘자본 독재’ 합리화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

오늘날 민주주의는 제반 정치적 지향의 상수로 자리매김 되어 있는 개념이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 절대적 가치로 각인되어 온 정치적 이념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한국 정치사에서 언제 한 번이라도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된 적이 있었던가. 그 이전에 민주주의라는 게 과연 신성불가침한 이념의 지존으로 추앙해야 할 가치일까. 지금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면서 민주주의의 본질적 가치를 재조명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 같다.  

민주주의란 사회의 상부구조로써의 정치 체제 가운데 하나를 일컫는 말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나타난 정치형태였던 데모크라티아(demokratia)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다수’를 뜻하는 데모스(demos)와 ‘지배’를 뜻하는 크라티아(kratia)가 결합한 말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지배, 또는 인민에 의한 지배를 뜻한다. 그런데 고대민주주의에서 경제적 생산자인 노예계급은 민주주의의 주체에서 제외되었다. 그 때문에 흔히 고대 민주주의를 반쪽짜리 민주주의로 본다.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민주주의, 즉 근대민주주의는 링컨이 말한 것처럼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지배’로 이해되고 있다. ‘자유와 평등’에 기초하여 모든 인민이 정치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민주주의는 고대민주주의보다 발전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근대민주주의에 대하여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첫째, 지금의 민주주의는 ‘정치’ 영역에만 한정된 개념이다. 형식적으로는 모든 인민에게 정치적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제 영역에서는 ‘자본 독재’를 합법적으로 보장하는 민주주의를 말한다. 즉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지배’를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근대민주주의는 부르주아민주주의이며, 자본가계급 스스로의 표현에 의하면 ‘자유민주주의’이다.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독점의 자유를 합리화하는 민주주의라는 뜻이다. 

둘째, 지금의 민주주의는 정치영역에서마저도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고 있다. 대의제에 따른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제외하면 아무런 정치적 권리도 없는 민주주의이다. 그나마 돈으로 표가 거래되는 선거 방식의 민주주의는 물질적 부를 가진 자들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는데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구축된 제도이다. 따라서 지금의 민주주의는 실상을 왜곡하는 선언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물질적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지배하지 못한 인민이 정치권력을 지배하기 어렵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줄 뿐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치는 경제의 시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우리가 막연히 민주주의라 부르는 ‘근대민주주의’는 ‘부르주아민주주의’이며, 자본가계급 표현대로 ‘자유민주주의’이다. 더불어 그것은 경제 영역에서 약육강식에 의한 수탈을 보장하는 제도이다. 사회적 생산수단을 소수 자본가가 사적으로 독점하고, 그 물리적 힘을 바탕으로 정치권력까지 독점할 수 있도록 교묘하게 설계된 시스템을 이르는 말인 것이다.

부르주아민주주의에서 인민민주주의로

사실 사전의 의미만 고려하더라도 민주주의 제도에서 모든 인민은 정치적 지배와 동시에 사회적 생산수단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하는 게 기본이다. 하지만 노동자들 자신이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나 직장에 대하여 소유권과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가? 학교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가? 어쩌다 한 번 선거 때 투표용지에 권력을 위임하는 것 말고, 도대체 이 사회 어디에 민주주의가 작동되고 있는가.  

사실 온전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란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생산수단들을 개인들의 소유에서 사회적 지배로 바꾸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며,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민주주의는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지배 장치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전제를 밝히지 않은 채 막연히 민주주의를 지키자고 호소하는 것은, 잉여노동을 수탈당하는 노동자와 인민대중에게 “자본주의 지배 질서를 이대로 확립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야성을 잃어버린 야권의 민주주의란 그런 것이다.

계급적 각성 없는 촛불은 횃불이 되지 않았다. 관련자 처벌과 개혁을 요구하며 수만 자루 양초를 태웠어도, 하루가 멀다 하고 시국선언이 쏟아져도, 국정원은 기세가 꺾이기는커녕 온갖 추잡한 이슈를 생산하며 존재감을 과시해 왔다. 더불어 박근혜 정권의 사과도, 국정원에 대한 이렇다 할 개혁 방안도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 밥줄 끊긴 노동자들의 분노도, 전세대란의 주택위기도, 물가폭등의 불안도, 밀양에서 벌이는 한국전력의 만행도, 후쿠시마 발(發) 방사능 공포도 말끔하게 묻혀버렸다. 

이른바 ‘범야권’을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의 민주주의와 자본가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사적 소유를 보호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같은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과 인민대중이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이와 다르다. 그것은 인민이 실질적으로 생산수단과 정치권력을 지배하는 ‘인민민주주의’를 말한다. 저들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질서를 안정적으로 지키는 것이지만, 인민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반자본주의 계급투쟁에 힘을 모아, 사회주의 정당 건설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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