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18일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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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 해방연대에 대한 법원의 항소심 무죄 판결을 환영하며
해방연대  ㅣ  2015년 4월 29일
편집자주 ㅣ 해방연대는 지난 1월 22일, 항소심 선고재판에서 무죄선고를 받아냈다. 2012년 5월 22일 4명의 회원이 연행, 압수수색을 받으며 시작된 공안기관의 국가보안법탄압은 이로써 다시 한 번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해방연대의 판결은 당당하고 원칙적인 탄압 대응을 통해 얻어낸 것이자, 국가보안법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여전히 한계가 있지만 사회주의 정치활동의 공간을 일정정도 확보해낸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아래의 글은 항소심 무죄판결 당일 발표한 입장글이다. 이 글을 통해 보다 자세한 투쟁과정과 판결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동지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1.
노동해발실천연대(준)(약칭 해방연대)는 2005년 6월 11일 “인간다운 삶의 확보와 야만으로부터의 해방은 자본주의의 극복,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라는 취지를 분명히 하며, 사회주의 정치조직으로서 발족하여 지금까지 활동해왔습니다.
공안세력은 2012년 5월 22일 해방연대 회원 4명(성두현, 이태하, 최재풍, 김광수)에 대한 연행, 압수수색을 시작으로 해방연대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때부터 해방연대에 대한 공안세력의 탄압은 시대착오적이고 무리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 이미 무리한 수사라는 경찰 관계자의 인터뷰가 실렸고, 실제로도 공소시효 2주를 남겨두고 급박하게 이루어진 연행과 기소였습니다.
해방연대는 ‘국가보안법에 의한 어떠한 탄압, 처벌도 부당한 것이며, 국가보안법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기조를 가지고, 국가보안법 폐지와 사회주의 활동의 자유 보장을 요구하며 투쟁하였습니다. 연행과 조사과정에서 이러한 기조에 입각하여 진술거부를 하였고, 재판에 임해서도 우리의 사상을 당당히 밝히고 국가보안법으로 이를 금지하는 것은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현실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주의 활동의 정당성이 더욱 커져가고 있다는 점을 계속 강조하여 왔습니다.

2.
2012년 10월 8일 시작한 1심 재판은 해를 걸러 2013년 8월까지 14차례의 공판이 진행되었습니다. 이 재판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해방연대는 선거투쟁과 대중투쟁의 결합, 선거를 통한 집권은 조직의 노선으로 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안검찰은 해방연대가 폭력혁명, 무장봉기를 추구하고 있다는 누명을 씌우기 위해 “”폭력혁명의 우회적 표현“ 등의 용어를 써가며 해방연대의 내심은 겉으로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다는 관심법을 동원하였습니다.
해방연대를 기소한 검사들은 비슷한 시기 서울공무원 간첩사건에서 증거 조작의 책임이 있는 검사들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 공안세력들이 얼마나 무리한 수사를 하였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공안세력은 재판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속셈에서 해방연대 회원 3명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진행하였고, 해방연대 회원 한 명의 경우엔 근무하고 있는 회사까지 직접 찾아가 사측에 수사내용을 고의로 공개하는 짓까지 하였습니다.

재판에 제출된 증거에서는 경찰이 해방연대에 대해 프락치 공작을 한 내용이 담겨 있어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일관된 재판 투쟁을 전개한 결과, 2013년 9월 12일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피고인 전원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이로써 오랜 재판투쟁에서 일단계 승리를 쟁취한 것입니다. 이 판결의 가장 큰 의의는 사회주의 활동 합법화의 단초를 열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반면 무죄 선고는 변호인의 주장 대부분을 거부하였고 매우 제한된 범위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1심 무죄 판결은 사회주의 활동의 전면 보장, 국가보안법 철폐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그러나 작지 않은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3.
1심 무죄판결 후, 검찰은 곧장 항소하였습니다. 2심 첫 재판은 2013년 11월 19일 시작되었습니다. 검찰은 1심 판결이 사실오인, 법리오인이라며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4명의 증인을 신청하였습니다.
첫 번째 증인은 해방연대를 수사, 기소를 담당한 후 퇴직한 공안경찰이었습니다. 첫 번째 증인부터 증인 자격이 논란이 되었습니다. 검찰은 해방연대를 수사한 당사자에게 사실 증언이 아닌 전문가 증언을 들으려는 황당한 시도를 하였고, 이것이 논란이 되어 재판부는 사실 증언이 아닌 증언에 대해서 심문을 금지시켰습니다. 또한 재판 증거에 나타난 프락치 공작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발뺌을 하다가 나중에는 이를 우회적으로 시인하기도 하였습니다.

두 번째 증인은 전직 전대협 연사국장을 했다가 뉴라이트 계열로 전향한 전직 운동권 출신 인사였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증인은 울산에서 활동하는 회원의 회사 본청, 하청 관리자들이었습니다. 입증 취지는 해방연대의 국가변란 선전선동 활동이 기업에 큰 경제적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황당한 입증 취지 때문에 재판 내내 세, 네 번째 증인 신청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결국 재판부는 당 재판과 연관이 없다는 이유로 증인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2심 재판은 2013년 12월 2차 공판을 끝낸 후, 재판부의 변경 등의 이유로 2014년 10월까지 근 10개월간 열리지 않다가 10월 21일 속개되어 오늘의 선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4.
해방연대가 탄압을 받은 지 딱 2년 8개월이 되는 오늘, 2심 재판부는 해방연대에 대해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최종 판결문의 내용은 아직 입수하지 못하여 정확한 내용은 아니지만, 법정에서의 판결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재판장은 검찰의 항소 요지와 1심 판결 요지를 낭독한 후, 국가변란 선전선동에 대해 검찰의 증거에 의해 국가변란선전선동의 실제 목적과 이것의 실질적 해악이 입증되어야 하며 표현물 역시 국가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적극적이고 궁극적으로 위협이 되어야 한다는 점, 민주주의는 억압적이지 않고 자율적이어야 하며 통념에 위배되더라도 원칙적 논쟁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 또한 이는 헌법과 형사소송법에서 제시하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와 죄형법정주의에 의거해 엄격하게 결정되어야 하는 점을 들어, 모든 증거에 의해서도 검찰의 주장은 입증되지 않는다고 판결하였습니다.

아울러 헌법에서도 자본주의의 폐해를 시정하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구하고 있고 신자유주의에 의한 갈등에 대한 해법이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는 중에 사적 소유 철폐나 토지 국유화 등의 주장이 다소 과격하더라도 토론될 수 있어야 하며, 강령초안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나오지만 해방연대는 기존에 사용된 프롤레타리아 독재 용어가 구소련과 북한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부르주아 독재에 대한 대구로 특수한 정치형태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주장 역시 다른 의도를 숨기려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판시하였습니다.

이번 항소심의 판결은 비록 내용상의 한계가 많지만 사회주의 활동의 합법화 단초를 연 1심 판결을 다시 확인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해방연대는 이렇게 열린 공간을 활용하여 사회주의 활동의 전면적 보장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해 보다 열심히 투쟁해 나갈 것입니다. 아울러 오후에 내려진 내란음모 재판 대법 판결과 관련하여, 비록 해방연대가 국가보안법 무죄를 받았다 하더라도 악법인 국가보안법의 부당성 자체에 어떠한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며, 해방연대는 국가보안법에 의한 어떠한 탄압도 용납되어서는 안되며 국가보안법은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끝으로 그동안 해방연대의 투쟁에 함께 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앞으로 남은 투쟁에서도 끝까지 함께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015년 1월 22일

노동해방실천연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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