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18일 87
해방 > 87호 > 정세

세상이 고약해지는 진짜 이유,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부재
김광수  ㅣ  2015년 4월 29일

 세상 거칠 게 없는 정권

주한 미 대사를 피습한 사건에 대해 미국에서는 극우폭력으로, 한국에서는 종북좌파의 테러로 규정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자국대사의 피습을 사고로 규정하는 미국과 달리 종편과 새누리당 지도부는 종북과 좌파를 버무려 테러로 승화시키고 있다. 진실과 규명이라는 말은 뒷전이고 짜깁기와 견강부회가 널뛰기를 하는데도 무기력한 야당은 다 죽어가는 소리로 주절거리는 시늉만 한다.
주한 미 대사에게 과도를 휘두른 사람의 노선이 김일성보다는 김구에 훨씬 가까다는 건 상식임에도 좌익척결, 좌파적출의 칼춤시위는 백주대낮에도 살기등등하다. 급기야 미대사가 입원하고 있는 병원 앞에서 박정희의 사위라는 자가 석고대죄를 하고, 기독교인들은 회복기도회에서 눈물의 부채춤을 추는 희한한 광경을 연출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폭락했음에도 이 지경인데, 행여 지지율이라도 높았으면, 뭔 일이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노동정치의 부재?

많은 사람들이 다른 나라의 사례를 들먹이며 이 나라 지배계급의 후안무치와 야바위 근성이 노동정치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는 푸념을 늘어놓는다. 이른바 진보적 식자층에서 그런 소리는 유독 높다. 그러면서 해산한 민주노동당의 잔해들과 좋게 봐주어야 소자산가들의 정당들과 연합해 제 3세력을 만들자고 호소한다. 꼭 특정한 정치적 흐름과 같이하지는 않아도 노동정치의 부재를 들며 민주노동당의 향수를 읊조리고, 유럽의 사민주의 정당에 부러운 시선을 보내며 이 땅의 현실에 개탄을 쏟아내는 사람을 얼마든지 소위 진보적 매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와중에도 어이없는 것은 종국에는 노사정협의체가 부재하다는 식의 한탄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세력관계에 있다는 전제를 깔고는 있지만 결국 노동운동에 분열과 재난을 초래했던 합의주의의 망령을 불러들이는 자신들의 개량주의적 DNA가 발휘되고 있다.

상승하는 계급이 끌어내는 사회적 긴장


다음 사회의 주역이며, 역사적으로 상승하는 피지배계급의 등장은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지배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분투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중세 때나 종교개혁시절에 빈번히 일어났던 농민 반란군은 공포와 진압의 대상이었지 스스로 자신을 경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체제의 도전자로 여겨지지 않았다. 교황과 주교들이 가장 증오한 농민군의 정신적 지도자 토마스 뮌쩌의 기도문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겠노라고 시작한다. 그러나 계약서를 가지고 세상을 뒤집을 주역들은 아직 교황청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고리대업자나 방물상인에 머물러 있었고, 농민들 입에서 나오는 계약이라는 단어는 농민들의 일상이 아니었음을 이들은 본능적으로 간파했다.

지배계급이 노동운동에 긴장한 건 이 운동이 착취를 일소하기 위해 일체의 사적소유를 폐지하고, 계급을 폐지하겠다는 사회주의사상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들의 눈에 사회주의 운동은 부르주아 사회의 계약적 합리주의는 절대 따라오지 못할 근본적이고 철저한 반종교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했던 것이다. 

사회주의 노동운동만이 노동자계급을 상승하는 진취적 계급으로 만든다


상승하는 계급은 민감하다. 구체제의 부조리와 마주서서 일체의 타협을 거부한다. 그래서 자신보다 저열한 국가나 부문을 수탈해서 번영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떡 고물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것의 역사적 사례 중 하나가 사회주의 운동이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고, 아울러 식민지 해방투쟁에 연대했을 때이다. 식민지 민중의 고혈을 털어 자기 월급봉투 두툼해지는 것을 거부하는 연대의 행동이 노동자를 상승하는 계급으로, 그리고 새로운 사회의 주역으로 만든 것이다.

이 땅에서 노동의 존재감이 없다는 한탄은 노동운동이 어디 낄 때가 없어서 기웃거리는 추태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오죽 못나게 보여서”라는 자기비하로는 세상이 바뀔 수 없다. 계약서 운운하는 뮌쩌의 기도문이 성직자들의 멸시를 불러일으켰듯이 야권연대로 굴러 떨어진 의원직 몇 자리로 상징되는 노동정치 운운은 자본가들의 멸시를 받기 딱 좋은 태도다. 중세농민에게 본능은 토지라면, 노동자에게 본능은 자본가계급을 일소하는 것이다. 농민에게는 소출을 안 뺐기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노동자에게는 월급 주는 놈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노동자의 투쟁이 근본적이다.

이것을 온전히 표현할 때만 세상이 노동자를 의식한다. 노동자의 근본적 전망과 노동자가 지향하는 삶을 표현하는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발전해야만 세상은 비로소 노동자계급의 눈빛을 의식할 것이다. 사회주의를 학습하고, 토론하고, 그리고 노동자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하는 길만이 노동자를 모욕과 멸시에서 자존과 존경으로 이끌 것이다.
  

관련기사

기사평쓰기
번호 제목 평점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등록된 게시물이 없습니다.

HTML코드 복사하기 (블로그나 카페에 바로 붙여넣기 하실 수 있습니다)


어느 노 교수의 묻지마 변신
[입장] 해방연대에 대한 법원의 항소심 무죄 판결을 환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