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0일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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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소유하고 경영하라(3)] 독일혁명의 기관차가 된 노동자평의회
김광수  ㅣ  2013년1월10일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지 불과 며칠만에 소련군이 괴멸하고 독일군이 소련 영토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다 알다시피 열등한 슬라브족이 맑스주의를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독일나치는 소련인민을 무차별 학살했다. 독일 친위대의 악랄한 짓에 대한 소련인들의 첫 반응은 어리둥절이었다. 괴테와 베토벤의 나라이자 맑스와 엥겔스의 나라 군인들이 야차로 변한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유럽 사회주의자들이 1차 대전을 앞두고 쏟아낸 전쟁반대 말잔치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전쟁에 찬성한 독일사민당의 결정에 어안이 벙벙해 졌을 것이다. 독일은 20세기 가장 비극적인 의외성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나라지만, 그 나라의 노동자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고,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조직을 통한 새로운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제기한 의외성 또한 가지고 있다.



베를린 현장위원회

1차 대전 때, 두 나라의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헛된 죽음을 강요하는 두 나라의 전제군주를 몰아내고 혁명을 일으켰다. 제정러시아에서 먼저 혁명이 일어나고 채 1년이 되지 않아 독일 병사와 노동자가 일어났다. 분명 독일혁명은 수병들이 일으켰지만 수병 반란에 호응한 베를린의 총파업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독일혁명 이면에는 베를린의 현장위원(잡 스튜어트)들이 있었고, 이들은 독일혁명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잘 알려진 대로 전쟁공채에 찬성한 독일사민당보다 훨씬 전에 독일 노동조합은 적극적인 전쟁 찬성자였다. 1914년 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독일 노동조합은 사민당에 앞서 전쟁에서 패배가 독일노동자들에게 끔찍한 일이 될 것이라는 이유로 전쟁에 적극 찬성하는 논리로 돌아선다. 현장과 밀접한 결합을 가지고 있었던 현장위원들, 특히 베를린 지역의 금속노동조합 산하 선방공과 용접공 지부는 중앙조직에 맞서 전쟁에 반대하는 소수그룹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전쟁이 실제 발발하면서 대중의 불만을 조직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레닌에게 노동귀족이란 소리까지 들었던 독일금속노조가 전쟁에 대해 불만을 갖기 시작한 것은 전쟁기간동안 파업을 할 수 없게 한 정부 조치때문이었다. 전쟁중에 치솟는 생활비에 비례해 임금을 올려야 하는데, 임단투 파업을 할 수 없게 되자 평조합원들은 불만이 쌓여 갔다. 결국 전쟁을 반대하는 파업투쟁이 불가피해졌고, 여기에서 여전히 전쟁에 협조적이었던 독일금속집행부를 대신해 파업을 조직하는 것은 온전히 현장위원들의 몫이었다.
당시 베를린의 현장위원 중에 유력한 활동가였던 뮐러는 1916년부터 해마다 파업을 조직하였다. 1916년 칼 리프크네이트의 체포에 항의하는 파업을 시작으로 1917년에는 식량부족에 항의하는 파업, 그리고 마침내 1918년 1월에는 베를린 노동자들 절반이 참여하는 전쟁반대 파업을 주도하였다. 1918년 1월의 파업에서 비로소 현장위원들이 주도하는 파업지도부가 노동자평의회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평의회가 1918년 총파업을 성공적으로 조직하기 몇 달전에 독일 사민당이 마침내 전쟁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분열되었다. 독일사민당에서 갈려나온 독립사회당에 대부분의 현장위원들이 가입했다. 그래서 1918년 총파업은 독립사회당과의 협력하에 진행되었고, 사민당 일부 일꾼들과도 협력을 했다. 이 총파업의 성공은 뮐러그룹이 전국적으로 자신들이 조직망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현장위원회는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는 노동자 조직이 되었다. 비록 총파업이 성공적으로 조직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성과는 없었다. 현장위원회는 이때 총파업을 계기로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으로 무기를 비축하기 시작했고, 전제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결정적 전투를 준비했다. 


총파업에서 혁명으로  

러시아 10월 혁명이 성공한 후 러시아와 독일은 정전을 위한 회담에 들어갔다. 독일전제정부는 이 전쟁은 방어를 위한 전쟁이라고 독일 노동자에게 공언했지만 정전회담이 진행될수록 독일제국주의의 본질이 드러났다. 독일제국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영토병합을 요구했고, 동구를 독일 식민지화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과감 없이 드러냈다. 그러면서 정전협정은 계속 미루어지기 시작했다. 혁명러시아를 압박하기 위해 군사작전이 간헐적으로 지속되었고 서부전선에서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기독교의 영향력하에 있는 노동조합까지 전제정부를 전복시키지 않고는 이 전쟁을 끝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앞서 1918년 파업은 10월 혁명이 일어나고 불과 몇주 후에  정전협정이 무산되자마자 일어났다. 그러나 이 파업은 아직 군대가 전제정부에 충성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전제정부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수병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독일 수병역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전함이 증기기관을 이용하는 철갑선으로 바뀌면서 떠다니는 공장이 되었고 수병들은 노동자들 가운데 차출되기 마련이었다. 당연히 수병들의 정치의식은 높았다. 10월 말 독일 제국군대는 영국함대와의 결정적 전투를 명령했지만 누구에게나 그 전투는 자살에 가까운 것이었다. 수병들은 반란에 성공했고 혁명은 바다에서 육지로 상륙했다. 북부도시 키엘에 병사위원회가 수립되었다.
수병들의 반란이 베를린에 도착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결정적 시기를 망설였던 노동자평의회는 수병반란이 도착하자 때가 무르익었음을 즉각 알아챘고 노동자평의회의 간부가 체포되자 다음날 총파업이 선언되었다. 반응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노동자들은 거리로 나왔고 경찰서와 부대를 저항 없이 접수했다. 전제정권은 간단히 무너졌다.  
1918년 11월 8일 혁명이 성공하자 노동자 평의회는 병사위원회와 함께 노동자 병사 위원회를 구성하고 혁명정부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에 합의했다. 그러나 다음날 치루어 진 선거결과는 노동자 평의회를 소수로 만들었고, 혁명활동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은 사민당정부를 출범시켰다. 그 때부터 독일혁명은 혁명정부의 탈을 쓴 에버트 정권의 노동자 학살의 역사였다. 노동자 평의회에 대한 정부의 공격앞에서도 노동자 평의회는 대중이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지만 노동자 대중은 오히려 혁명이 성공한 후에도 사민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독일에서 노동자 평의회 운동


1919년 초 뮐러와 동료들은 노동자 평의회라는 신문을 내기 시작했다. 이 신문은 그 동안 여러 형태의 평의회가 있었지만 공통적인 이론적 근거가 없이 흩어져 있고, 공동의 강령도 없던 노동자 평의회에 체계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특히 뮐러는 이 신문을 통해 생산자들이 지배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일관된 전망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노동자 평의회는 혁명적 수식어에 불과했던 사회화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한 유일한 그룹이다. 혁명 후에 중공업 및 기간산업을 사회화하자는 요구는 노동자 평의회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고, 미조직 노동자나 기타계급에서도 호응을 받는 요구였다. 전국노동자 평의회는 혁명정부였던 인민위원회로 하여금 사회화를 밀어붙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민당이 다수였던 정부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비록 혁명적 노동자는 패배했지만 정부는 아직도 완전한 통제권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1919년 봄에 일어난 파업은 노동자평의회가 이끈 가장 강력한 파업이었고, 이때 노동자들은 바이마르 주도를 포위하고 국회 의사진행을 못하게 막으면서 노동자 평의회로 갈 것인지 국회로 갈 것인지 미래사회에 대한 선택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번 파업도 1월과 마찬가지로 똑 같이 지역적으로 고립되고 분산되었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고 뮐러와 공산주의자 빌레름 코헤넨이 전국적 조직망을 통해 힘을 집중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1919년 3월의 파업은 내전에 가까운 충돌 끝에 군대에 의한 학살극으로 막을 내렸다. 
1919년 파업이 실패한 후 노동자 평의회는 공장, 직장위원회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그건 지역적 결합이 거의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봄에 일어난 총파업 압박속에서 국회는 노동자 평의회를 헌법 조항에 넣는 입법안을 마련하였다. 노동자 평의회는 이를 경제 전체에 대한 개입 및 통제권한을 부여하는 쪽으로 몰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결과는 노동자평의회를 직장단위에 제한하고 경제문제와 관련해서는 생산에 대한 통제는 빠진 채 사업주까지 포함하는 계급협조적인 조직, 지금의 경영참여제도로 변질시켰다. 이 법안에 대한 베를린 노동자들의 투쟁은 격렬했고, 42명이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법령은 변하지 않았다.


독일 노동자 평의회의 역사적 의의

노동자 평의회는 독일혁명의 분명한 주역이었다. 산별노조에서 직책을 맡은 것도 아니고, 이론적으로 수준 높은 사람들도 아니지만 현장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고, 거리에서 공장에서 직장에서 항상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독자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 투쟁에는 항상 앞장섰던 우리가 집회에서 늘 보는 같은 얼굴이라고 자조하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피로 이룬 혁명이었기에 혁명에게 노동자들의 청구서를 내밀었다. 기간산업의 국유화, 전국적 경제활동에 대한 노동자 통제, 그리고 단위사업장에서 노동자 통제을 요구했고, 새헌법의 법률로 만들려고 했다. 비록 이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았고, 전국적인 조직망의 결여로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21세기 노동자투쟁에서도 독일노동자들이 내민 청구서는 여전히 사회주의로 가는 통행세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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