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0일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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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누가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가?
박남일  ㅣ  2013년1월10일

18대 대통령 선거 직후인 12월 21일 아침.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최강서 조직차장이 노조사무실에서 목을 맸다. 다음날 울산에서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 이운남 전 조직부장이 아파트 19층에서 몸을 던졌다. 또 같은 날 서울민권연대 활동가이자 비정규직 노동자 최경남 씨가 스스로 연기에 질식하여 목숨을 끊었다.
죽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모처럼 화이트크리스마스였던 12월 25일에는 전국대학노동조합 한국외대지부 이호일 지부장이 목을 맸다. 이어 26일 새벽에는 그의 빈소를 지키던 이기연 수석부지부장마저 호흡곤란으로 쓰러져 끝내 숨을 거두었다. 이 시대에 가장 거룩한 삶을 살던 이들은 가장 먼저 자본의 폭력에 희생되었다. 



자살한 노동자들, 그들이 남긴 메시지는?


노동계 안팎에서는 이런 비극이 정권교체 실패에 따른 충격 때문이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눈물로 뿌렸다. 독재자의 딸이자 이 땅의 지배 자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됨으로써 자본가계급의 공세가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공포와 절망감이 자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불어 “살아서 싸울 것이지 왜 죽느냐?”는 천진난만한 소리도 여기저기서 나왔다. 그런데 이러한 연쇄 자살의 주된 원인이 단지 정권교체 실패에 따른 충격 때문일까.
돌이켜보면, 노동자들의 비극적인 자살은 전태일 열사의 분인 이래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왔다. 정권교체에 성공하여 ‘국민의 정부’를 천명한 김대중 정권 말기인 2003년 초에도 두산중공업 노동자가 배달호가, 그리고 노무현이 집권한 2003년 말에도 한진중공업 김주익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특히 지난 2009년 이후에는, 무더기 정리해고에 맞서 77일의 옥쇄파업을 벌인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 23명이 차례로 세상을 등졌다. 지난해 12월 4일에는 노조 파괴 사업장인 유성기업에서 50대 노동자가 우울증으로 자살을 했다.
저항 불능의 무기력한 상태에서 노동자들이 줄줄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것은 이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한국 노동운동과 변혁운동이 처한 보편적 현실이 되었다. 특히 파업투쟁을 겪은 노동자들이 심각한 정신적 상처와 극도의 생계 곤란으로 대부분 우울증을 겪는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자살의 주된 원인이라는 우울증이 노동자들에게 널리 퍼진 보편적 전염병이 된 것이다. 더불어 노동자들의 뇌가 이처럼 우울증을 앓고 있는 이상, 앞으로도 자살로 인한 죽음의 행렬은 쉽게 멈추지 않을 것이다. 
흔히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한다. 감기는 그 자체가 병이라기보다는 온전치 못한 몸 상태를 드러내는 신호일 뿐이다. 따라서 감기나 우울증은 곧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면, 우리는 그 증세가 가리키는 달을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울하게 죽어간 노동자들의 손가락이 가리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대로 노동자계급운동의 씨를 말릴 것인가?


이즈막의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에 대해 용역 깡패나 공권력 등을 이용한 직접적 폭력 말고도 천문학적 금액의 ‘손해배상청구소송’과 ‘재산가압류’라는 법적 폭력을 동원하여 노동자들의 목줄을 죄어 왔다. 이처럼 법의 폭력을 이용한 신종 탄압은, 노동운동의 퇴조와 더불어 10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예컨대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의 분신자살 뒤에는 65억 원의 손해배상청구와 재산가압류가 있었다. 또 한진중공업에서 고공농성 중에 목숨을 끊은 김주익의 죽음도 150억 원에 달하는 손해배상청구소송과 관련이 있었다. 최근에 최강서 차장을 죽음으로 내몬 한진중공업의 손해배상청구액은 158억 원, 이운남이 소속된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116억 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이 제기된 상태였다. 나날이 교묘하고 교활해진 자본가계급은 노동자계급의 가장 약한 고리를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인간의 생존이나 생명보다는 사유재산을 우선시하는 법제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민사소송의 올가미에 걸려든 노동자들이 하소연할 곳은 없었다. 국가기관의 중재 따위는 당연히 기대할 바 없었다. 계급간의 투쟁이 아닌 ‘재산다툼’ 앞에서는,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연대투쟁도 무의미했다. 다수 대중의 모금으로 손해를 배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따라서 그들이 개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사측의 요구에 무릎을 꿇고 모욕적으로 사표를 쓰거나,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뿐이었다. 
이처럼 악랄한 자본가 계급의 횡포 앞에서 노동운동 진영은 대부분 무기력했다. 입으로 진보정치를 외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도, 노동조합 상층 관료들도 모두 침묵했다. 책임 있는 단위의 지도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본주의의 근간인 소유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나아가 자본주의 자체에 반대하는 운동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닥치고 정권 교체’를 외치며 도박 같은 선거 전술에 놀아났다. 그 사이에 노동자계급운동은 씨가 마르고 있었다.


지난 대선, 선거에 대한 환상 버리는 계가 되어야


이즈막에 빚어진 노동자들의 연쇄 자살은 모름지기 그 후유증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밑도 끝도 없이 정권교체 논리를 노동자들에게 퍼뜨리며 헛된 희망을 뿌려댄 자유주의 세력과 기회적인 직업정치인들, 그리고 부르주아 정치세력의 유혹에 넋을 빼앗긴 민주노총의 관료들은 누구보다 먼저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양대 부르주아 세력이 현실 권력의 정점을 두고 벌이는 대통령 선거. 그것은 자본가계급에게 안정된 착취의 연장을 확인하는 축제이다. 그럼에도 ‘진보의 맏형’임을 자처하는 민주노총이나, 진보를 참칭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것은 정권교체 이후에!”라고 강요하며 선거에 모든 것을 걸어버렸다. 마침내 블랙홀이 되어버린 선거는, 노동자계급의 당면한 생존권 문제도, 노동현장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악랄한 탄압도 모두 집어삼켜버렸다.
한편, 현실 권력에 대한 욕망에 눈이 어두운 그들은 정권교체에 실패한 경우를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더불어 대중은 최악보다는 차악이 낫다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투표로 권력을 이길 수 있다는 환상에 젖었다. 그리고 ‘유권자’로 포장된 대다수 노동자, 민중에게 선거는 결과적으로 죽음의 축제가 되었다. 하지만 책임 있는 인사들은, 줄줄이 이어지는 노동자들의 죽음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거나 잠시 눈물 쇼를 벌이는 것으로 넘어가려 했다. 그들에게 뼈저린 반성은 없었다. 어쩌면 대선 직후에 줄줄이 목숨을 던진 노동자들의 손가락은 이들을 가리키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선거로 계급 착취를 끝낼 수는 없다. 투표를 이용한 정권교체는 지배적인 사상을 관철하는 가장 긴요한 수단이다. 그것이 체제 유지에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은 투표를 독려한다. 그 때문에 대통령선거 때마다 사람들은 두 개의 선택지를 놓고, 하나는 악이고 다른 하나는 선이라는 이중적 논리에 휩싸여 왔다. 여기에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한다는 변종 논리 또한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최악이든 차악이든 모두 악의 범주라는 사실이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


자본가계급과 그 계급의 이해에 봉사하는 기구로써 국가는, 사유재산 보호와 사적 이윤의 창출이라는 구체적이고 확고부동한 방향에 따라 움직인다. 지금껏 그들은 집요한 계급이데올로기를 구축하며, 선거를 통하여 자신들의 목표를 관철시켜왔다. “당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리던 마르크스의 명제는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반면 노동자계급은 운동의 뚜렷한 방향을 잃고 헤매었다. 자신의 힘을 결집하여 자본가계급과 맞장 뜨는 것은 너무 지난한 길이라 여겨 지레 포기했다. 대신 상대적으로 착해 보이는 자본 권력이 상대적으로 악해 보이는 자본권력과 벌이는 권력다툼에 스스로 동원되는 것을 ‘노동자정치세력화’ 따위로 포장하며, 부르주아 선거판의 전리품 한 조각에 기대를 걸었다. 거기에 노동자계급의 보편적 요구는 들어설 틈이 없었다. 오히려 노회한 운동 관료들의 권력에 대한 탐욕만 넘쳐났다. 계급운동의 역사적 성과가 아니라, 운동의 결과를 사적 권력으로 누리고자 하는 속된 욕망 말이다. 
권력적 성과에 바삐 다가가려는 욕망은 필히 사람을 조급하게 한다. 그런 조급함은 또한 속도에 대한 열망을 몰고 온다. 그러나 속도보다 중요한 건 방향이다. 방향 없는 속도,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일선 노동자들이 죽음의 문턱을 헤매게 하는 주범인지도 모른다. 더디더라도 정확한 방향, 즉 역사적 법칙에 부합되는 방향을 향하여 똑바로 걸어가야 하는 까닭이다.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이라는 목적이 역사적 전략이라면, 거기에 부합되는 지금의 전술적 방향은 ‘반(反)자본주의’여야 한다. 2013년 새해가 밝았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가속화될 것이다. 따라서 올 한해는, 노동자계급운동이 사적 소유를 철폐하는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나아가는 원년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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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도 보여주지 못한 채 실패한 노동자대통령 후보 전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