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5일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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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소유하고 경영하라(2)] 파리코뮌과 노동자통제, 자주관리
황정규  ㅣ  2012년10월25일

맑스와 노동자통제, 자주관리

노동자통제, 자주관리라는 표현은 맑스의 시절에는 쓰이지 않던 용어였다. 그렇다고 맑스의 사상에 노동자통제, 자주관리에 대한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당시 노동자통제, 자주관리는 ‘협동조합’의 일종으로 제기되었다. 자본주의 초기부터 협동조합은 자본주의의 대안 중 하나로 등장하였다. 특히 프로동이나 라살레는 서로 상이한 정치적 견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협동조합을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무정부주의자인 프루동은 노동자계급에 의한 노동자국가의 수립, 이를 위한 정치투쟁을 부정하였을 뿐 아니라 노동조합을 통한 노동자계급의 투쟁 역시 부정하였다. 라살레는 한 사회의 임금의 총량은 불변으로 정해져 있다는 임금총칙설에 입각하여 임금인상 등 노동조합 투쟁은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이들은 공히 협동조합이 확대되어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맑스는 이들의 ‘협동조합’론을 비판적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협동조합’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의 주장이 노동자계급의 경제투쟁과 노동조합이 지닌 중요성을 부정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맑스는 경제투쟁과 노동조합이 비록 한계가 있지만, 노동자계급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중요한 의의 역시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맑스가 협동조합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낸 것은 아니다. 이미 그 당시에도 협동조합으로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적인 견해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맑스는 협동조합의 의의와 아울러 그 한계 역시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의 극복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역시 이야기하였다. 협동조합에 대한 맑스의 견해는 1866년 작성한 제1인터내셔날의 “개별문제들에 대한 지시들”에 잘 정리되어 있다.
맑스는 협동조합 운동이 “자본에 대한 노동의 예속이라고 하는 빈궁을 낳는 전제적인 현재의 제도가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의 공화주의적이고 다복한 제도에 의해 대체될 수 있음을 실천적으로 보여 준다”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와 아울러 맑스는 협동조합 운동이 사회변혁에서 제대로 된 의의를 가지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개별 임금노예의 개인적인 노력을 넘어 전반적인 사회변화를 위한 투쟁, 노동자들이 국가권력을 쟁취하는 투쟁과 결합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두 번째로 협동조합 상점, 즉 유통부문에서 이루어지는 협동조합이 아니라 경제제도의 토대를 공격하는 협동조합 생산에 집중해야 한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협동조합이 자본주의적 기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익의 균등한 분배를 강조하였다.
맑스가 강조한 협동조합 생산이 바로 지금의 노동자 자주관리라 할 수 있다.



파리코민의 등장

파리코뮌은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해방을 위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기존의 국가기구를 해체하고 노동자계급의 해방이라는 목표에 맞게 새로운 국가기구를 형성해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노동자통제, 자주관리와 관련해서도 앞서 언급한 맑스의 주장을 입증하였다.

1871년 파리코뮌의 혁명은 이보다 한 해전 발발한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이 계기가 되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참패하게 되었다. 이러한 참패 속에서 제정은 지속될 수 없었다. 1870년 9월 제정은 몰락하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전쟁의 패배 와중에 프랑스를 침략하고 있는 프로이센에 맞서 싸우고자한 세력은 바로 파리의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하였다. 부자 구에만 존속하고 있던 국민방위대(프랑스 혁명 시부터 존속하였던 파리 시민들의 민병대)는 빈민 구까지 확대되어 9월 말에는 35만 명으로 팽창하였고, 화포를 3,000문 가량 보유하게 되었다.(당시 파리를 포위한 독일군 병력은 총 15-20만 명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프랑스의 지배계급들은 프로이센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계급에 오히려 맞서기 시작하였다. 파리를 포위한 프로이센군에 의해 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파리의 민중의 노고를 부정이라도 하듯이, 총선거로 구성된 티에르 정부는 파리의 민중에 맞선 대결정책을 추진하였다. 프로이센군이 아니라 노동자를 피해 수도 파리를 버리고 베르샤유로 도망친 티에르 정부와 파리의 민중들 사이의 투쟁은 정부군과 파리 국민방위군 사이의 무장충돌을 야기하였다.

지배계급이 도망친 파리에서, 1871년 3월 25일 국민방위대 중앙위원회는 다음날 즉각 코뮌 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선거 결과 85명이 당선되었는데, 이중 20명의 온건 공화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회주의 경향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3월 28일 정식으로 파리 코뮌이 선포되었다.

파리코뮌의 조치들

파리코뮌은 권력을 장악하자 그 즉시,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요구를 대변하는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소위 “풍기경찰”의 영구적 폐지, 징집과 상비군의 폐지 및 국민방위대를 유일한 무장력으로 인정, 전쟁기간의 주택임대료 면제, 코뮌에 선출된 외국인의 집무비준, 정교분리, 잔인한 사형제의 상징인 기요틴의 파괴, 국수주의적 상징물인 방동광장의 원주 파괴, 제빵소의 야간작업 금지, 전당소 금지 등의 조치들이 이루어졌다.

아울러 파리코뮌은 다음과 같이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운영되는 국가를 수립하였다.
• 상비군의 폐지와 무장한 인민으로의 대체
• 공직의 선출과 소환
• 입법과 행정의 의회적 분리가 아닌 입법과 집행이 결합된 행동적 기관
• 노동자의 임금수준을 받는 공직자

이러한 파리코뮌형 국가는 끊임없이 노동자민주주의를 확대하고 피선출자들이 대중과 분리된 독자적 세력으로 전환되는 것을 막으며, 이를 통해 계급적대와 억압을 폐지시켜나간다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는 파리코뮌을 “철저하게 팽창될 수 있는”,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음이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라고 규정하였다.


파리코뮌과 노동자자주관리

파리코뮌의 조치들 중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파리코뮌이 생산을 완전히 새롭게 개조해가려고 했다는 점이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추구하는 국가가 기존의 자본주의적 생산과 기업운영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회사를 운영하던 자본가들은 대부분 파리를 도망친 상태였다.

따라서 파리코뮌은 1871년 4월 16일, 포고를 통해 폐쇄된 공장들에 대한 통계표를 작성하고, 버려진 작업장에 대해 자본가들에게 약간의 보상금을 주고 노동자들의 협동조합에 넘겨줄 방법을 연구하게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 협동조합들을 거대한 연합체로 조직할 계획을 작성하게 명령하였다.

이러한 파리코뮌의 조치들은 단지 개별 기업을 노동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자주관리 기업으로 전환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산업을 노동자 자주관리로 전환하여 자본주의의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를 완전히 대체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아울러 생산의 운영 역시 개별 생산단위에 의한 무정부적 결정을 극복하는 전사회적인 생산의 계획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물론 이러한 조치들은 이를 가능하게 하는 노동자국가인 파리코뮌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흔히들 노동자통제와 자주관리에 대해, 그것이 개별적 기업에 한정되었을 때에는 여전히 자본주의적 생산의 법칙이 유지되고 결국에는 노동자들이 운영만 할 뿐 실제는 자본주의식 기업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평가를 한다. 이러한 평가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파리코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노동자통제, 자주관리 투쟁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착취, 억압체제의 결과물인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의 소유관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생산과 사회운영의 주체로서 앞장서게 하는 데 있어, 상상력과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그리고 노동자통제와 자주관리가 자본주의 생산 법칙의 덫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노동자국가를 수립하고 전사회적 생산을 노동자들의 통제와 계획 하에 두기 위한 투쟁으로 더욱 더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파리코뮌은 정부의 공세로 패배하였다. 그러나 파리코뮌은 혁명을 열망하는 노동자계급에게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이 되었다. 우리는 파리코뮌의 조치를 통해 노동자통제, 자주관리에 대한 지혜 역시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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