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8일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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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회주의, 그 길을 묻다(3)] 동지의 꿈은 무엇입니까?
김광호 (강원 비정규센터 소장)  ㅣ  2015년 5월 28일
편집자주 ㅣ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고, 자본주의가 노동자 민중의 인간다운 삶과 더 이상 양립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는 사회주의의 오랜 구호가 절심함을 얻고 있는 엄중한 역사적 시기인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미력한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활발한 토론과 소통 역시 드물어진지 오래이다. 사회주의 정치신문 <해방>은 이러한 상태를 타개하고 사회주의자들의 다양한 고민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는 지면을 마련하였다. 이 지면은 조직에 속해 있든 개인으로 활동하고 있든 상관없이 “한국 사회주의, 그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다양한 사회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담고자 한다. 우리의 시도가 사회주의 운동의 일보 전진을 위한 계기가 되길 바란다.

노동자들이 꿈꾸는 세상이 무엇인가?

노동자들과 만나면 항상 궁금한 것이 있어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주제가 있는데 바로 “노동자들이 꿈꾸는 세상이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하면, 도대체 현실이 바뀌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기를 바라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현실의 문제로 싸우고 있지만,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의 모습이 투쟁에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세상에선 정리해고도 없을 것이고, 임금도 넉넉하게 받고, 무상의료나 무상교육도 실현되는 세상일 것이다. 이런 세상을 많은 노동자들이 이렇게 표현한다. 노동해방세상, 참세상, 평등세상 등. 그럼 과연 이런 표현은 노동운동이 표방하고 있는 새로운 세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개념인가?

이런 의문을 갖는 이유는 새로운 세상의 운영원리가 현실에서 실현되는 과정이어야 하고, 그 구체적인 목표가 또한 현실에서 분명한 지향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 운동인데 현실은 영 딴판이기 때문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제1인터내셔널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린다면 우린 그 노동자의 성(적 지향)이나, 고용형태, 피부색 등에 따라서 차별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노동자들 내부의 차별은 여전하고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새로운 세상에서는 노동자의 민주주의가 조건 없이 구현되어야 하지만 우리 운동은 여전히 자본가계급의 탄압에 맞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싸우면서도 정작 노동조합 내에서 민주주의는 근근이 규정에 의해서 유지되거나 오히려 절차와 규정 때문에 압살당하고 있다. 공정한 하루의 노동에 대한 공정한 하루의 임금을 요구하는 것이 낡은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여전히 운동은 임금제도의 폐지를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종 편법으로 임금총액을 올리거나, 더 많은 노동시간(물량)을 확보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이 있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힘으로만 쟁취할 수 있다고 했지만 노동자들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미래를 위탁하는 것도 모자라 현장에서는 자본가계급과의 화해와 협력을 유연한 대응으로 승인하는 노사협조주의에 비판의 목소리조차 없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다. 가장 많은 비판은 바로 운동이 후퇴했기 때문이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운동의 후퇴는 결과일 뿐 원인이 될 수는 없다. 상대적인 것이지만, 자본가계급의 탄압이 거세진 것만이 운동이 후퇴한 핵심적인 원인일 수 없다. 세계적으로 전투적 조합주의의 상징과 같았던 한국의 노동운동이 후퇴를 한 것은 바로 전투적 조합주의였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결국은 조합주의일 뿐이었던 것이며, 조합주의는 경제의 호황기에 자본가계급에게 여유가 있을 때는 작은 승리들을 쌓아가면서 승리감에 도취되지만 자본(주의)의 위기에서는 언제든지 타협과 굴종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투쟁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작은 승리에 취해 투쟁의 목표가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운동의 목표는 분명하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 계급의 폐지만이 노동자들의 고통을 끝장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과연 우리 운동은 그러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되물어야 한다. 이 지긋지긋한 자본주의를 뛰어 넘기 위한 근본적인 지향이 현실운동에서 구체적인 전술적 목표로 동의되고 실천되고 있는지, 그 과정이 바로 노동자 민주주의를 구현해나가는 과정인지 되물어야 한다. 우리가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그것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꿈꾸는 그 세상의 상이 분명해야 그 구체적인 목표와 경로도 계급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현실 운동의 지향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무엇인지, 그래서 어떻게 건설해야 하는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할까?


학습인가, 실천인가? 둘 다 함께 가는 것이고 방식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나는 사회주의 학습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사회주의 학습의 결과를 검증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어야만 우리 운동이 제대로 된 목표, 전략과 전술을 수립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 노동조합에서 학습이라는 것이 온통 임단협에 집중되어 있어서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실천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생존권적 요구를 노동운동 본연의 임무인 것처럼 현혹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자본가계급의 파트너인 조합주의가 강화되고 있을 뿐이다.

사회주의 학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군더더기 없이 ‘생산수단의 노동자 소유’문제를 노동운동의 근본적이며 직접적인 과제로 승인하는 것이다. 실천의 기준이 되는 계급적 당파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다면 “임금인상투쟁도 제대로 조직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당장 현장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자는 것이냐?”며 교조주의, 맹동주의라는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이것은 요즘의 투쟁이 문화제라는 형식에 갇혀있는 것을 비판하면 “그럼 지금 화염병을 들자는 것이냐?”며 ‘평화적인 민주주의’를 강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과연 그런가? 당연히 아니다. 계급적 당파성을 갖추고 있느냐, 생산수단의 노동자 소유를 목적으로 하는 계급의 폐지를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강령으로 동의하느냐에 따라서 현안 투쟁의 전술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제대로 된 투쟁전술을 수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투쟁을 외치는 것만으로는 현안문제조차 해결할 수 없다.

물론 사회주의 학습을 조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노동조합 활동의 경험이 많을수록 관료화되어 있거나 조합주의에 찌들어 있어서, 원칙적으로는 동의한다면서도 학습 자체를 회피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안문제가 산적해있다거나, 조합원들이 골치 아픈 학습을 외면한다는 이유도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대충 유명 강사를 초대하는 정세 강연으로 땡빵하는 것이 지금 학습의 모든 것인 상황에서 말이다.

동지들에게 제안한다. 조합원에 대한 학습계획을 지금 당장 논의하자. 말랑말랑한 인문학 강의, 힐링 수련회 따위가 아니라 사회주의의 핵심을 학습하기 위한 계획을 자신의 조직에 제안하자. 조합원을 설득하든데 실패하더라도 본인만큼은 동의한다면 본인부터 학습을 시작하자. 사회주의 학습은 그렇게 시작하면 된다. 사회주의적 실천을 조직하는 것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실천적 목표를 가졌을 때 가능하다. 노동자들의 삶의 고통이 새누리당이나 정치권,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무한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래서 자유주의자들로의 정권 교체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정치권력을 직접 쟁취할 때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선전하자. 사회주의자들과의 연대를 조직하자. 현장에서의 현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에서 사회주의적 원칙을 세우기 위해서 노력하자. 근본적인 투쟁으로 나아가기 위해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투쟁에 연대하며 투쟁의 중심을 만들어 나가자. 조합주의적 관료주의와 노사협조주의를 목도하면서도 침묵하고 있는 관성에서 탈출하자. 이 모든 것에 조합주의적 관료들이 주도하는 절차와 형식에 따라 진행되는 위탁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때론 과격해 보일지라도 격렬하게 토론되는 노동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자.

내용이 채워지면 그에 걸맞은 조직의 형식도 갖춰질 것이다. 많이 모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제대로 된 내용, 즉 사회주의를 분명한 실천적 목표로 승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할 지점이다. 어설프게 쪽수가 중요하다고 말랑말랑한 내용이나 사회주의 정치활동의 원칙을 스스로 훼손하는 이합집산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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