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18일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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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불법 폭력보다 위험한 합법 폭력
박남일  ㅣ  2015년 12월 18일



지난 11월 14일, ‘민중총궐기’ 시위 현장에서 경찰이 직사한 물대포에 농민운동가 백남기 씨가 쓰러졌다. 최루액이 든 고압의 물줄기는 이미 길바닥에 쓰러진 그의 몸을 짓이겼다. 구호 조치를 위해 달려든 사람에게도 물폭탄이 쏟아졌다. 그리고 경찰은 코와 입에 피를 흘리는 백남기 씨를 호송하는 구급차에까지 물대포를 조준함으로써 환자 이송을 방해하기도 했다. 결국 백남기 씨는 병원에 옮겨져 5시간의 대수술을 받았지만 깨어나지 못한 채 한 달가량 사경을 해매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박근혜 정권의 폭력성이 부각되고 있다. 더불어 경찰의 불법적 진압에 대한 책임과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그런 요구가 관철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하긴 요구가 관철된다 하더라도 경찰의 폭력적 본질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경찰의 불법, 폭력적 시위 진압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승만 정권을 필두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정권 시절의 끔찍한 폭력적 진압은 그 사례가 너무 많아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렵다.

그 후에도 반정부 성격의 농성과 집회와 시위 현장에는 언제나 경찰의 폭력적 진압이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노무현 정권 시절이던 2005년 11월 15일. ‘WTO 쌀 협상 비준안’ 국회처리를 반대하는 전국농민대회에서도 끔찍한 폭력 진압이 벌어졌다. 그리고 경찰이 휘두른 곤봉과 날선 방패에 맞아 수십 명의 농민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로 인해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있던 전용철(당시 43세) 씨와 홍덕표(당시 68세) 씨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같은 집회에 참가한 두 명의 농민이 경찰 폭력에 의해 사망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허준영 경찰청장은 “폭행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말로 진압경찰의 혐의를 부인했다. 심지어 전용철 씨의 사인에 대해 “간경화 말기인데다 술 먹고 구토하고 쓰러졌을 개연성이 높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자의 명예를 훼손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인권위 조사를 통해, 두 농민의 사망 원인이 경찰의 폭력이라는 결론이 나온 뒤에야 청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경찰의 폭력 진압에 대해 직접 대국민 사과에 나섰다. 하지만 노무현은 시위대의 ‘쇠파이프’ 또한 문제 삼으며 양비론적 태도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공권력의 주된 적은 자국 인민이다

이처럼 폭력적 시위 진압으로 인명 피해가 난 것은 박근혜 정권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다. 이른바 ‘나쁜 정부’, ‘좋은 정부’를 막론하고 어느 정권 하에서도 공권력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간 공권력은 언제나 안전 고리가 위태롭게 달려 있는 폭탄이었다. 그러다가 정권이 위기에 처하면 언제든 그 안전 고리를 뽑혔고, 그로써 인명이 희생되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책임자 처벌이나 통치권자의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공권력이라는 폭력장치의 안전 고리를 단단히 채우라는 요구도 있었다. 그러나 이슈가 잠잠해지면 언제든 공권력의 위험은 다시 노출되었다.

한국의 공권력만 그런 게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이다. 하와이대 교수 럼멜의 <정부에 의한 죽음>에 따르면, 지난 20세기 100년 동안 전 세계에서 2억3백만여 명이 군대와 경찰 등 합법적 공권력의 폭력에 살해당하였다. 그런데 이 가운데 83%인 1억6천9백만여 명이 민간인이다. 더욱 경악할 것은, 사망자 중 65%인 1억3천여만 명이 자국민이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세기가 커다란 전쟁이 많았던 시기임을 감안하더라도 자본주의 시대의 공권력이 자국의 인민대중을 주된 적으로 삼아 살해해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와 같은 정부에 의한 살인은 21세기에 들어선 이후에도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규모로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공권력이 다수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 착각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처럼 공권력은 지배계급에 의해 독점된 폭력이며, 그 주된 적은 자국 인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권력의 본질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 또는 ‘치안 유지’에 있다는 지배이데올로기에 깊숙이 오염돼 왔다.



공권력에 중립은 없다

지금까지 자본가국가는 우리에게 두 가지 미신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해왔다. 그 첫 번째는 인간은 본래 폭력적이라는 미신이다. 그에 따라 인간이 모인 곳에서는 언제든 우발적 폭력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러한 혼란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독점적 폭력수단으로써 공권력이 필요하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인간들 사이의 폭력이 인간 사회 고유의 속성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잉여생산물과 잉여노동을 수탈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갈등이 표출 형태일 뿐이다. 더불어 역대 지배계급은 그러한 폭력적 수단을 독점적으로 구축해왔다. 그리고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그 독점적 폭력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합법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이렇게 합법성을 획득한 공권력이 ‘중립적’이라는 미신이다. 하지만 폭력에는 중립이 없다. 공권력의 폭력 또한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지배계급의 이해에 따라 행사되는 독점적 폭력이다. 따라서 공권력은 철저히 계급적 성격을 가진다. 최근에 한상균 민주노총위원장의 검거 과정에서 도로교통 방해죄를 위반한 피의자 한 명을 위해 수백, 수천 명의 경찰력이 동원된 바 있다. 이런 현실은 공권력의 존재가 보편적 인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다수 인민 대중에게 불안을 조장하는 역할에 충실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 사회는 생산수단을 독점한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 인민대중을 착취하면서 지배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는 힘이 곧 국가이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경제적 기초를 보호하고, 피지배계급의 저항을 질서 유지, 또는 치안이라는 명목으로 철저히 억누른다. 이를 위하여 국가는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군대, 경찰, 사법기관, 교도소 등 물리적 기구를 갖추고서 인민에 대한 압수 수색, 체포, 감금, 현금탈취(벌금), 그리고 심지어는 살인(사형)까지도 합법적으로 행한다. 게다가 이러한 물리적 폭력 기구를 적대적 계급의 자식들을 징집하여 충원하고, 세금을 거두어 그 운영비를 충당한다.

공권력은 계급국가를 지탱하는 구조적 폭력 장치

국가는 겉으로는 사회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행세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수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한다. 예컨대 노예제 사회에서는 노예주들끼리 노예를 매매하고, 심지어 살해할 수 있는 권한까지도 국가가 보증해주었다. 자본가국가는 대자본가의 사적 이익 실현을 위하여 엄청난 세금으로 산업기반시설을 건설해준다. 또 파산 직전에 처한 대자본가를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구제해주기도 한다. 게다가 국가는 노동자들의 해고를 용이하게 해주기 위해 법적 장치를 마련해준다.

또한 국가는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파업을 행사하면 공권력을 파견하여 무력으로 짓밟기 일쑤다. 파시즘적 독재 국가가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의제, 또는 의회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폭력성이 다소 완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국가는 숱한 이데올로기와 물리적 공권력을 이용하여 지배계급의 독재기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이 격화되거나 체제의 위협을 받으면 국가는 자국민에 대하여 언제든 가차 없는 폭력을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한편 지배계급이 구축한 폭력적 질서는 피지배자의 폭력적 저항을 유발하고, 이러한 저항은 다시 지배계급의 폭력을 야기해왔다. 이에 대하여 종교인이나 자유주의적 평화주의자들은 흔히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모든 폭력’에 가장 거대한 폭력체계인 공권력에 구축된 폭력적 힘은 포함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공권력의 본질이 중립적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러나 가시적 폭력에만 시선을 둔 채 일상적 폭력 구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공권력에 의한 살인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불법 폭력보다 위험한 건 자본가계급이 구축한 합법적 폭력이다. 결국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자본가들이 독점한 폭력적 국가제도 자체를 해체하고, 그 대안으로써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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