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4일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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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노동자 투쟁으로 펄펄 끓었던 1946년 여름의 기록, <화순>
김광수  ㅣ  2015년 11월 14일


화순은 내 가족과의 인연이 깊은 곳이다. 일본탄광지역에서 해방을 맞이한 할머니와 아버지는 우여곡절 끝에 해방조선으로 나와 사람과 돈이 있겠다 싶은 곳으로 떠돌았는데, 처음에 여수항으로 들어와 정착하고, 6.25가 나고서는 화순탄광지역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화순은 빨치산이 강력했던 곳으로 낮에는 경찰세상이고, 밤에는 빨치산 세상이 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동네 남자란 남자는 다 끌려가 죽거나 다치기 마련이었는데, 딱 두 사람만 멀쩡했다한다. 한 사람은 의사였고, 한사람은 동네 수력발전소 기사였다. 당연지사로 양 진영 모두에게 필요했던 사람들이었으니, 무탈할 수밖에. 그래서 가난하고 못 배운 소년이었던 아버지는 기술자가 되기로 결심해 나중에 선반공이 되셨고, 당신 아들 또한 전기쟁이로 만드셨다. 우리 가족사에서도 지울 수 없는 생채기였던 화순이지만 노동자투쟁의 역사에서도 그 존재감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은 건 한참 나이가 찼을 때였다.

몇 해 전 돌아가신 마지막 전평 조합원, 이수갑 선생의 9월 총파업 강의를 듣다가 처음 접한 화순탄광의 투쟁사를 마침내 연극으로 만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이수갑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1946년 광복절을 기념하러 광주로 가던 화순탄광 노동자들에게 미군정은 기관총을 발사했고, 이로 인해 수십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다치는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전국 노동자들이 이에 대해 반드시 앙갚음을 하겠노라고 벼르고 있었다고 한다. 9월 총파업이 부산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순식간에 펴져 나간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과 무관치 않았다는 것이다.

뮤지컬의 이야기는 45년 해방이후 노동자가 자주관리하던 화순탄광에 미군이 명령서를 들고 진입하는 때부터 시작된다. 이때부터 시작된 긴장은 점령군이었던 미군정이 막아선 46년 8.15 기념식에서 마침내 폭발하고, 그 해 10월에 전개된 파업투쟁으로 이어진다. 유일한 진입로였던 다리를 폭파시키며 치열하게 전개되던 노동자들의 투쟁이 미군정의 총칼에 마침내 패배하고, 투쟁의 와중에서 새총으로 미군에게 저항하던 아이들 중 아비 잃은 사내아이들이 겨울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사실 뮤지컬의 초입은 탄광에서 갱도가 무너지고, 무너진 갱도에서 구조될 희망도 잃어갈 때, 관리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갱도를 파고 들어온 동료들이 소리치는 것으로 시작된다. “지금 디지면 안돼야, 해방이 됐단 말이오!” 해방된 날 구조된 광부들과 가족들의 애절한 만남, 그리고 해방된 나라에서 자주관리하는 노동자들의 힘찬 모습과 행복한 마을의 전경, 그리고 주인된 노동자들이 부르는 노래부터 나는 눈물바람이 시작되었다. 아마 같이 관람하던 쌍용자동차 해고자들도 비슷했으리라.

“우리는 광부들 어둠 속에서 빛을 캐낸다. 자랑스런 노동자. 우리는 광부들 어둠속에서 조국을 밝힌다 새 조국의 주인이다“

극에서 보여주는 역사에 대한 의식수준은 80년대 대학생들이 많이 읽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그걸 어느 정도 뛰어넘었던 것은 이수갑 선생이 말씀하셨던 내용이 탄광가족의 입에서 나왔을 때이다. “좌우가 어디 있나? 있다면 친일, 친미를 반복하는 매국노가 있을뿐이오” 그렇다. 미군정의 여론조사에서도 사회주의에 대한 선호가 80%가 넘었던 시절이고, 한줌도 안되는 매국노들과 미군정이 있었을 뿐, 무슨 개뼉다구 같은 좌우대립이 있었단 말인가?

다만 실제 그런 사례도 있었겠지만, 탄광촌의 아이들이 빨치산이 되는 결말은 아쉽다. 파업이 무너지고 노조가 무너져도 노동은 계속되고, 투쟁도 계속된다. 화순의 탄광 막장이 막혀도 생산은 계속되고 생산이 있는 어느 곳이나 계급투쟁은 시작된다. 그렇다! 대중투쟁이 무너졌고, 이 땅의 자본주의가 독립투사들의 주검을 밟고 일어났지만 그 무덤을 팔 노동자는 이제 1,800만을 넘었다. 중국의 노신은 “생활이 있어야 투쟁도 있다“고 했다. 운동가도 먹고는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한 말이지만, 인류가 절멸하지 않는 한 삶은 지속되고 삶이 있는 곳에 투쟁과 노동자의 꿈은 계속된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싶다. 부르주아지들이 그리고 그 똘만이들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승부는 그래서 이미 결정이 나 있다. 왜냐하면 연극에 등장한 화순의 광부와 그 연극을 보고 꺼이꺼이 우는 노동자들 사이의 유대는 부르주아가 갖고 있는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고 그 유대야말로 수많은 실패에도 궁극의 승리를 가능케 하는 보증이다.

“삶이 있는 곳에 마침내 승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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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보장요구 투쟁은 계급투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