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15일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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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을 배반한 치프라스의 ‘쿠데타’, 이제 그리스 노동자 민중이 나설 때이다
황정규  ㅣ  2015년 7월 15일



기괴하게 돌아가는 그리스의 정세

7월 5일 그리스에서 유럽 ‘기관’(시리자 정부 집권 직후 이루어진 2월 협상에서는 그리스의 목을 조르고 있는 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 IMF를 지칭하는 명칭인 ‘트로이카’ 대신 ‘기관’이라는 명칭으로 변경한다는 기만적 합의가 있었다)들이 요구하는 협상안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61%가 넘는 반대가 나왔다는 소식이 전세계로 타전되었다. 이러한 소식은 하나의 승리로 받아들여졌고, 많은 진보, 좌파세력들이 이 승리를 함께 기뻐했다.

그런데 이런 소식이 전해지기 무섭게, 시리자 정부가 유로그룹(유로존 재무장관 회의)에 새로운, 이전보다 더 후퇴한 협상안을 제시하였다는 황당한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13일에는 협상 끝에 합의에 도달하였다는 소식이 국내 포털 사이트에 뜨기 시작하였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시간동안 긴축에 반대하여 민중의 자존을 보여줬던 그리스에서 가혹한 긴축안에 합의하는 정치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치프라스의 ‘쿠데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


보다 구체적인 상황전개를 살펴보자. 치프라스는 6월말 국민투표를 호소하면서 “우리는 권위주의와 가혹한 긴축에 침착하고 단호하게 민주주의로 맞서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탄생지인 그리스는 유럽과 세계 공동체에 민주주의의 메시지를 울려 퍼지게 해야 합니다”라고 연설하였다. 이것이 교언영색이었다는 것은 국민투표 결과가 나온 직후 곧장 드러났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의 많은 이들이 국민투표 결과에 반하는 치프라스의 굴종적 합의를 ‘쿠데타’로 칭하기 시작하였다.

• 치프라스는 트위터에 “우리는 유로그룹이 우리에게 제시한 최후통첩보다 더 나은 합의를 가져 올 것을 위임 받은 것이지,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하라는 위임을 받은 것은 분명히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 7월 6일 아침부터 그리스 대통령의 비호 아래 야당들(이들은 과거 집권시 트로이카의 긴축정책을 수용한 정당들이다)을 모아 유로존 탈퇴불가를 전제한 협상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7, 8일부터는 브뤼셀의 유로기관에 적극적인 구애를 시작하였다.

• 7월 9일 오전에는 시리자 의원들에게 급하게 작성된 것이 명백한 협상안을 발송하였다. 오직 정부 각료 중 보수정당이라고 비난받던 집권파트너 ANEL 소속 파노스 카메노스와 시리자 내 분파 좌파플랫폼의 파나기오티스 라파자니스만이 이 협상안에 서명을 거부하였다.

• 7월 10일 시리자 정부의 협상안에 대한 의회 표결이 진행되었다. 합의안 비준이나 법률안 통과도 아닌 단순한 정부협상안에 대한 의회 표결은 사실 상 협상에 대해 백지위임장을 요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7명의 시리자 측 정부 인사들이 협상안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고 좌파플랫폼 소속 각료들은 장관직에서 사임하였다. 그 결과 과거 친긴축 집권정당이었던 그리스 사회당, 포타미, 신민주당의 협조 속에서 협상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 7월 12일 밤, 브뤼셀에서 독일 등 유로그룹과의 합의가 이루어졌고, 이 합의안은 15일 자정까지 의회 통과를 필요로 한다. 이로서 치프라스의 쿠데타는 최종 국면으로 넘어가고 있다. 자신이 권력을 잡게된 계급적 토대, 자신이 확언한 공약들을 모두 져버린 치프라스의 권력기반은 이제 시리자를 집권케 한 그리스 민중에서 긴축과 철저한 패배를 강요하는 유럽의 지배계급과 그리스 내의 반대당이 되었다.

이러한 치프라스의 행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유럽 최초로 긴축반대를 내건 급진좌파정당의 집권이라는 겉모습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시리자는 첫출발부터 이질적인 정치집단들의 연합체였다. 치프라스가 이끄는 다수파는 “시나스피스모스”라는 유로코뮤니즘 경향의 다소 온건적 세력에 기원을 두고 있다. 반면 시리자 내에는 이들 외에도 매우 급진적 경향의 세력들이 존재하며 이들 중 상당수는 ‘좌파플랫폼’이라는 의견그룹의 형태로 집결해있다. 2000년대 이후 대중운동 고양 속에서 시리자가 전반적으로 급진화되는 과정을 겪었고 매우 행동주의적 기풍을 형성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내부의 차이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 노동자민중을 고통으로 내모는 긴축정책에 대한 반대라는 측면에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지만, 긴축반대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서는 양측이 서로 대립해왔다. 치프라스의 다수파는 계속 유로존의 구조 내에서 트로이카가 강요하는 긴축정책을 막아보려는 입장을 취했고, 좌파플랫폼은 유로존 내에서는 긴축정책이란 칼을 전혀 막을 수 없다고 보고, 유로존 탈퇴를 요구해왔다. 유로존 탈퇴는 어떤 추상적 요구가 아니라 긴축반대의 가장 철저한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치프라스는 집권 직후부터 유로존, 즉 유럽 지배질서(이는 독일을 정점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지배질서이다)를 용인하는 전제 위에서 긴축과 구제금융 관련 협상을 전개해왔기 때문에, 계속 집권에 이르게 한 긴축반대 공약을 스스로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긴축, 민영화 등을 대거 수용한 2월의 합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후에도 이러한 협상태도는 바뀌지 않고 더 심화되었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들이 “명예로운 타협”과 “레드 라인”이다.

특히 5월 24일 시리자 중앙위에서 이러한 협상태도를 두고 충돌이 일어나자 다수파는 1) 부채상황을 위해 확보해야 할 우선예산잉여 규모의 축소, 2) 임금 및 연금에 대한 추가적 삭감 중단, 3) 부채 재조정, 4) 공공투자(하부구조, 신기술 등)을 위한 대규모 패키지를 협상 시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레드 라인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7월 12일 합의를 살펴보면, 535억 유로라는 대규모 구제자금(이것 역시 빚이다)을 받는 대신 스스로가 제시한 4가지 레드 라인은 저만치 멀리 넘어갔다. 그리고 유로존 탈퇴 불가가 새로운 레드 라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 레드 라인은 바로 유럽 지배계급이 그어놓은 레드 라인이다.

그리스 노동자, 민중의 투쟁은 이제부터이다.


급변하는 그리스의 정세 때문에 앞으로 어떠한 상황이 발생하게 될지는 쉽게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두 가지는 확실히 거론할 수 있다.

우선 자본주의에 맞서 철저한 사상과 행동으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패배는 자명하다는 것이다. 노동자민중의 절박한 삶의 요구를 그 정치적 귀결로 끝까지 밀고갈 수 있는 정치적 역량과 태세가 갖추어져야만 어려운 상황을 뚫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시리자가 집권하면서 다양한 반자본주의 정치세력이 하나로 결집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평론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사태의 전개를 이에 반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시리자 내의 좌파세력이 치프라스와 함께 한다면, 그것은 공멸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이제 분열과 더 단호한 사회주의정치세력의 형성이 불가피해지고 있다.

더 중요하게는, 30번이 넘는 총파업과 광장점거투쟁 이후 잠시 움츠렸던 노동자 민중의 대중투쟁이 새롭게 고양되어야 한다. 시리자의 집권, 국민투표에서의 61%의 반대는 사실 상 대중운동으로 분출하지 않고 있지만 민중의 현명한 의중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직접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 다행히 합의안 의회 통과가 예정된 15일을 겨냥하여 공공부문 노동조합이 총파업을 선언하였고 본격적인 조직에 돌입하였다고 한다. 이제 그리스 민중은 자신의 행동으로, 역사를 만드는 것은 민중 자신이라는 것을 다시금 입증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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