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9일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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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비극, 초라한 희극] ‘계급’ 없는 세대논쟁은 교묘한 말장난
박남일  ㅣ  2015년 4월 29일






달관세대. 안정된 일자리나 출세를 포기하고 적게 벌어 적게 쓰면서 대강 만족하며 사는 젊은 세대를 뜻하는 신조어라 한다. 몇 년 전 일본에서 유행한 ‘사토리 세대’의 한국 버전이다. 한국 청년 세대에 보편화된 키워드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난 2월 하순에 조선일보가 재빠르게 이 말을 낚아챈 뒤 3회에 걸쳐 이와 관련된 시리즈 기사를 내보냈다. 100만원 안팎의 수입으로 알뜰하게 소비하면서 즐길 건 즐기고 산다는, 그래서 지금 이대로 행복하다고 믿거나, 혹은 그렇게 표현하는 몇몇 청년에 대한 이야기였다.

조선일보의 달관세대 시리즈는 세대논쟁에 불을 지폈다. 세 편의 기사에는 모두 1만 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면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기사에 공감을 보내는 의견이 띄엄띄엄 보이는 가운데 “그게 무슨 달관이냐, 삶을 포기한 거지.”라는 반응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논쟁은 여러 매체로 번져 달관세대에 대한 ‘꼰대’스러운 훈계들이 이어졌다. 진보를 자처하는 매체에서는 ‘달관이 아닌 비관 세대, 또는 절망세대’라며 조선일보 기사를 비판하기도 했다. 어쨌든 달관세대 시리즈는 제법 광범위한 세대논쟁에 불을 지피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새로운 세대를 대상화, 타자화한 신조어들

어느 시대든 낡은 세대는 새로운 세대의 생활방식에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곤 했다. 물론 그 가운데 일부는 젊은 세대를 변호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후세대’, ‘68세대’, ‘386세대’ 따위처럼 .특정한 세대를 가리키는 신조어도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은 주로 이전의 역사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다루어졌다. 이에 비하여 신세대를 현재의 관점으로 대상화한 신조어가 나타난 것은 비교적 가까운 과거의 일이다.

예컨대 1990년대 중반에는 톡톡 튀는 젊은이들을 일컫는 ‘X세대’가 있었다. 더글러스 커플랜드의 소설 제목에서 비롯된 말이다. 또 뉴밀레니엄을 앞둔 1990년대 후반에는 미국의 프루덴셜 보험사가 얌전하게 순응하는 세대라는 의미로 ‘Y세대’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인터넷에 생활을 잠식당한 ‘N세대’와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 세대’라 일컫는 ’Z세대‘도 등장했다. 이러한 신조어들은 신세대의 새로운 문화와 소비 패턴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그런데 세계적인 장기 불황으로 고용 환경과 노동조건이 악화되면서 청년세대의 경제적 처지를 반영한, 성격이 조금 다른 신조어들이 나오게 된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이후에 유럽에서 일본으로 확산된 ‘NEET족(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은 취업을 포기한 청년 무직자를 뜻한다. 또 평생 아르바이트나 단기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프리터(free arbeiter)족’도 있다. 몇 년 전부터 일본에서 니트족과 프리터족을 아울러 ‘사토리 세대'로 부르기 시작했다. 득도(得道)한 세대, 즉 요즘 논란이 되는 달관세대이다. 한편 국내에서도 이미 ‘88만원세대’부터 시작하여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는‘ 3포세대’가 나왔고, 여기에 인간관계와 내집 마련, 취업, 희망을 차례로 포기한 ‘5포세대’, ‘7포세대’가 뒤를 이었다.

이러한 신조어들은 청년세대를 대상화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동시대를 사는 청년세대를 동등한 정치적 주체로 대하지 않고 이질적 계층으로 분리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까닭이다. 가령 X세대, Y세대 등 알파벳 이니셜로 특징화된 이름들은 새로운 소비계층으로 떠오른 신세대의 지갑을 털기 위한 마케팅 용어들이었다. 또 니트족이나 프리터족은 악화된 고용 환경의 피해자보다는 ‘도전하지 않는 무기력한 청춘들’이라는 힐난의 뉘앙스를 풍긴다. 게다가 사토리 세대에 이르면 청년들의 득도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대책 없는 족속들’이라는 비아냥거림이 짙게 묻어난다.

세대논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토리세대의 한국 버전인 달관세대 또한 ‘나름대로 행복하다는 청년들’에 대한 찬사는 결코 아닐 것이다. 달관시대 시리즈를 쓴 조선일보 기자 역시 연재를 마친 후 ‘기자수첩’에서 “본지의 보도는 그들을 긍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달관세대의 ‘행복하다’는 말을 모두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려운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 달관세대를 물고 늘어진 조선일보의 진짜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일보가 일본 아사히신문을 인용하여 내보낸 한편의 기사에서 그 의도가 확인된다. “일본의 경제 회복 여부는 ‘사토리’ 세대의 변화 여부에 달렸다.”는 제목의 기사에는, 일본 정부가 경제 회복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지만 소비 욕망을 잃어버린 젊은 세대가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한국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그로서 조선일보가 문제를 제기한 지점도 바로 거기였다. 기사의 부제에서 밝힌 것처럼 조선일보는 현실에 안주(安住) 젊은이가 많아지면 경제성장에 부담이 된다는 점을 걱정했던 것이다. 애초에 조선일보는 달관세대의 행복 여부가 아니라 그로 인한 소비 둔화를 걱정해왔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실 일본이든 한국이든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이 청년세대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일관성이 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문제의 책임을 개인들에게 돌린다. 니트족, 프리터족, 사토리 등의 신조어들도 애초에 청년 개인들의 탈소비적 태도를 질타하는 의미로 유포되었다. 그로써 노동조건이 열악해도 부지런히 일하고 부지런히 소비해야 경제가 살아난다는 이데올로기를 던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원인과 결과를 뒤바꾸어, 자본주의 공황의 피해자들에게 불황의 책임을 씌우고자 하는 음흉한 의도이다.

한편 세대논쟁에 편승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은 지금의 청년세대를 향하여 ‘결핍을 모르고 자란 세대’라고 나무라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결핍을 모르는 건, 예비노동자인 청년들에게 점점 더 완벽한 임금노예의 조건을 갖추라고 주문해온 자본이다. 이 시대 청년들은 지옥 같은 입시경쟁의 터널을 지나고도 다시 밑도 끝도 없는 ‘자기계발’ 경쟁을 벌이며, 억대의 비용과 함께 황금 같은 청춘을 취업 준비에 탕진해온 세대이다. 그러고도 정규직 일자리 얻기에 실패하여 망연자실한 청춘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갖가지 신조어를 들이대며 세대논쟁에 불을 붙인다.

물론 세대논쟁에서는 젊은 세대를 질타하는 목소리와 기성세대가 문제라며 젊은 세대를 옹호하는 의견이 맞서기도 한다. 그러나 세대논쟁이 펼쳐지는 과정에서 청년세대 문제는 일정 부분 청년들 자신에게 그 책임이 전가된다. 게다가 세대논쟁은 부모세대와 자식세대의 대립 양상으로 전개되기 마련이다. 거기에 함정이 있다. 예컨대 직장에서 해고당해 일용직을 전전하는 중년 아버지와, 편의점 알바로 근근이 용돈이나 버는 청년 자식을 대립시킴으로써 본질적인 계급불평등 구조를 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세대논쟁은 불평등을 야기한 자본가계급의 책임을 은폐하는 데 기여한다.

청년세대에 필요한 것은 ‘세대논쟁’이 아니라 ‘계급논쟁’

취업전쟁에서 밀려난 청년세대는 자신의 처지를 절망하고, 절망은 비관을 낳고, 비관은 달관을 낳는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청년세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공황과 사적 자본의 독재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며, 자본주의 체제의 속성상 이미 예정된 일이다. 따라서 청년세대든 중년세대든 경제적 불평등과 고용 불안은 세대 간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 간의 문제이다. 세대를 떠나 이 시대 노동자계급이 전면적으로 맞이한 현실인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자계급은 궁극적으로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 가난한 청년세대의 문제도 전체 자본가계급과 전체 임금노동자계급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빚어지는 사회적 착취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교묘한 말장난으로 청년세대와 기성세대를 대립시키는 세대논쟁은 노동자계급 내부를 이간질할 뿐이다. 그로써 자본가계급과 그들의 국가가 저지르는 일상적 착취 시스템은 은폐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대논쟁이 아니라 계급논쟁이다.

비관이든 달관이든 가난에 대한 청년세대의 개인적 태도를 탓할 수는 없다. 강요된 포기의 행진을 벌이는 청년들에게는 위로와 지지와 격려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긴 터널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터널에서 벗어나면 다른 누군가는 터널에 갇혀야 하는 딜레마는 여전히 남는다. 따라서 지금의 가난한 청년세대는 치열한 계급논쟁을 통해서 구조화된 가난의 원인을 깨닫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나아가야 한다. 달관은 해도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지금의 청년세대에 필요한 것은 취업의 기술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정신과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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