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18일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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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비극, 초라한 희극] ‘탈(脫)원전’은 ‘반자본주의’ 바탕 위에서 가능하다.
박남일  ㅣ  2015년 4월 29일



후쿠시마에서 재앙이 일어난 지 벌써 4년이다. 그 기간에 방사능 피폭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것이다. 이미 유소년 갑상선암 환자가 급증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사고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최근에도 후쿠시마에서는 대량의 방사능 오염수가 유출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드러난 사고는 빙산의 일각일 뿐 실제로 얼마나 많은 방사능이 유출되었으며, 얼마나 오염이 확산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일본 당국이 방사능 오염 확산 실태를 제대로 파악이나 하고 있는지, 또한 파악은 했더라도 그 내용을 얼마나 은폐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재앙이 지금도 소리 없이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나브로 확산되는 방사능의 공포. 그에 대한 대책은 없다. 도대체 후쿠시마 사고는 언제쯤 수습될 것인가. 전문가들은 원자로 설비를 걷어내는 데에만 최소 40년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도 별로 믿을 게 못 된다. 그 작업에는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사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사회적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변수도 작용할 수 있는 까닭이다. 요컨대 원전사고 수습 작업이라는 것은 거기에 동원된 가난한 노동자들의 숱한 희생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실은, 그런 희생을 치르고 원자로 잔해를 제거해도 이미 유출된 방사능은 그대로 남는다는 것이다. 

신규 원전 계속 짓고, 노후 원전 수명은 줄줄이 연장하고


지척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도 원자력발전을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 생각이 없는 얼간이이거나, 아니면 원자력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는 광신도이거나. 하지만 한국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반면교사로 삼은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국내에서는 원전과 관련한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예컨대 2012년 1월부터 2015년 3월 초까지 국내 원전에서는 33건의 안전 문제가 제기되었고, 42건의 고장 및 사고가 발생함으로써 부실하고 불량한 관리체계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또 부산, 울진, 월성, 영광 등 원전 지역 갑상선암 발병 피해자 540여 명이 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런 와중에서도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한국 정부는 꿋꿋이 원전 확대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원전이며 이미 한 차례 수명이 연장된 고리 1호기에 대한 수명 재연장 입장이 공개되었다. 또한 올해 2월에는 한수원 산하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설계수명을 다하고 멈춰 있던 월성 원전 1호기에 대하여, 국제 안전 기준에 미흡하다는 등의 지적과 함께 해당 지역 주민의 강한 반발이 있었지만 결국 수명 연장을 승인했다. 게다가 그 직후에 중동에 가서 한국형 소형 원자로 수출 비즈니스를 하고 돌아온 박근혜는 그 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원자력 광란(狂亂)에 정점을 찍었다. 하필이면 후쿠시마 재앙 4주기를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전횡이 일회적인 게 아니라는 점이다. 산업부에서는 올해 상반기에 원전 확대를 골자로 한 제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확정할 예정이라 한다. 그에 따라 지난 2월 16일에 그 기본계획안이 장관에게 보고되었다. 삼척에 짓기로 한 원전 2기는 유보하는 대신 영덕에 2029년까지 원전 4기를 신규 건설하고, 2029년까지 수명이 끝나는 노후 원전 9기의 수명을 줄줄이 연장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내용이었다. 그로써 박근혜 정부는 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원전 확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노후 원전 수명 연장이 월성 1호기나 고리 1호기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도 무겁게 다가왔다.



국의 전력수급계획이 거꾸로 가는 이유?

1991년 세계 발전량의 17%를 차지하던 원전 비중은 근래 들어 10% 안팎으로 떨어졌다. 반면 재생에너지 비율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게다가 전력 수요 또한 몇몇 개발도상국을 제외하면 거의 증가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경제규모는 커져도 전력 수요는 줄어드는 디커플링(Decoupling) 현상마저 보이고 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오래 전부터 지속적으로 전기 수요를 관리해온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오히려 원전 비중이 30%대로 높아지는 추세이다. 나머지 70%는 화력발전에 의존하고 있으며, 재생에너지 비율은 0.5% 이하에 머물러 있다. 게다가 1인당 전력 수요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치솟고 있다. 전력수급정책의 총체적 실패이며, 에너지 후진국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가 전력 수요 관리나 재생에너지 개발은 팽개치고 원전 중심의 전력수급계획을 끝없이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자본주의 성장 이데올로기를 맹신하는 대중적 요구에서 기인한다. 사실 원전 중심의 전력수급계획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과거 박정희 정권 이래 역대 모든 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해온 에너지 정책이다. 그리하여 원전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무지막지하게 달려온 남한 자본주의 발전의 주된 동력으로 각인되었다. 그로써 대중은 원전이 곧 풍요의 원천이라 여기게 되었다.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바탕 위에서 한국의 통치 자본가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원전 드라이브에 가속도를 낼 수 있었다.

물론 후쿠시마 재앙을 목도한 뒤, 많은 대중이 원전의 두려움에 눈을 뜬 건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4년간 위험은 눈으로 직접 확인되지 않았다. 방사능은 공포의 대상이지만, 그 실체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방사능의 위험이 자손만대에 전가된다는 사실도 애써 들여다보지 않으면 막연한 풍문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이든 한국이든 원전 마피아들은 방사능 위험에 대한 정보를 은폐하는 대신 막대한 물량 선전으로 원자력 안전신화를 전파했다. 덕분에 대중에게 방사능의 위험은, 실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 모순 속에 존재하게 되었다. 위험은 멀고 실익은 가깝다는 환상에 지배당한 대중은, 그로써 방사능 공포와 후쿠시마 재앙에 대한 기억을 조금씩 지워왔다. 그리고 원자력의 위험에 대한 피지배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한국의 전력 정책은 철저히 자본가계급의 사적 이익에 기여해왔다.



자본주의적 전력생산 구조를 바꾸어야 

그런데 원전 문제 이전에 한국의 전력 생산 구조는 기본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한국의 전력 산업은 공기업이 생산을 지휘함으로써 생산과 소비의 공공성을 유지할 조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기업이 전력 생산에 참여하는 미국 등에 비하면 중장기적인 친환경 재생에너지 개발을 적극적으로 주도할 여지가 훨씬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효과는 완전히 거꾸로 나타났다. 역대 한국 정부는 사기업보다 더 사기업의 마인드로 전력 생산을 관리했다. 그리하여 비싸게 생산한 전기를 ‘산업용’이라는 이름하에 자본가들에게 헐값에 공급하는 데 앞장섰다. 자립형 재생에너지 개발을 팽개치고 원전이나 화력발전처럼 집중화, 대규모화 된 전력생산에 목을 매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또한 한국의 자본가정부는 수조 원 대에 이르는 원전 건설 수주나 납품 입찰 등을 통해 업자들에게 황금알을 낳아주는 암탉 역할을 자임해왔다. 최근 3년간 한국에서 원전과 관련된 뇌물 수수, 향응 등 비리 사건이 89건이나 일어났다는 사실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 정부와 원전 관련 네트워크는 자본가계급의 이익에 철저히 부응했다. 한국의 전력수급계획은 에너지 자본과 이를 비호하는 세력의 이해관계 위에서 나왔다. 사회적 위험보다도 자본가계급과 권력집단의 사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경제 방식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또한 그것은 자본주의적 경제성장 신화와, 거기에서 파생된 원자력 안전신화에 취해버린 인민대중의 책임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원전 문제의 본질은 소비를 미덕으로 삼는 무정부적 생산방식에 있다. 따라서 성장을 전제로 한 자본주의적 전력 생산방식으로는 원전의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 지금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노후 원전부터 폐로하여 핵과 단절하는 당연한 일이다. 동시에 대체에너지 개발과 전력 수요 관리도 필히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신재생에너지로 주목받는 태양광발전이나 풍력발전도 자본주의적 대량생산, 대량소비 프레임 안에서는 또 다른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전력의 생산과 소비 방식 자체를 최대한 자급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탈(脫)원전’은 ‘반(反)자본주의’ 바탕 위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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